«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깊이에의 강요

싸가지 없는 진보 본문

雜食性 人間

싸가지 없는 진보

하나 뿐인 마음 2015. 1. 27. 04:42

 

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사.

 

얼마 전 당대표 후보자 토론회를 봤다. 뒷목 잡고 한숨 내쉬며 뒤늦게 찾아서 보고 있는 나를 수도 없이 후회하면서도 끝까지 보긴 했지만, 제1야당의 당대표를 한다는 사람들의 평균 수준이 정말 이 정도인가 싶어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긴 하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수많은 국민들이나 그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그 해결점은 무엇인지 나는 정말이지 답답하고 궁금했고 어떻게든 그 대답에 가까이 가고 싶어 이 책을 골라들었다.

 

민심 난독증. 입만 열면 민심을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도도한 민심의 흐름을 읽지 못하거나 아전인수 식으로 왜곡한다는 것.

무뇌증. 유권자의 의식 성향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고, 정당의 권력비판 기능과 범위도 변화했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은 과거 관행만 답습하는 등 뇌 기능을 '관성'으로 대체했다는 것.

나는 이 두 가지 병을 포괄하는 제3의 병명을 선사하고 싶다. 그건 바로 '싸가지 결핍증'이다.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민심을 읽지 못하고 관성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선거 결과에 대한 나의 총평은 이것이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의 무덤이다."

 

싸가지는 어쩌다 마시는 '식혜라기보다는 한 번 마시면 계속 마시게 되는 '커피'와 같다. 즉, 중독성이 있어 몸에 밴 습관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특별한 사안에 대해 싸가지 없이 굴다가 다른 일반적인 경우엔 싸가지 있게 구는 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싸가지의 있고 없음은 태도의 형식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의식과 신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용기'와 '파렴치'의 경계마저 무너뜨려 파렴치한 짓을 하면서도 용감하고 의로운 행동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싸가지'라는 단어에 대한 논란부터 시작하여 한동안 잡음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나 읽을만 했다. 상황과 문제점을 성찰, 파악하고 해결, 대안점을 마련하는 노력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도 없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이 책은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 시점에 있어 꼭 되짚어봐야할 문제를 다뤘다고 본다.  

 

'빠'와 또는 '빠'들끼리 싸우더라도 '싸가지 있는 싸움'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접을 순 없다. 달리 말해, '성찰이 이간디'는 정도의 희망조차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진보의 진보 비판에 대해선 포괄적 원칙이나 이론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비판의 사안별 적합성이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이 옳다. 즉, 어떤 비판이 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거나 그 이유를 자신의 입장에서 논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법칙을 만들겠다는 식으로 상대편의 '비겁함' 또는 '무지'를 들먹거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에겐, 읽으면 읽을 수록 이 책은 싸가지 없는 진보만을 위한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 편, 네 편 갈라져 싸우는 게 어디 정치판만의 일인가.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상대를 공격하고 막다른 곳으로 몰아세워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당 안에도 널리고 널렸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는 황희 정승의 자세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한때는 황희 정승의 태도야 말로 비겁함의 또다른 표현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을, 이것 또한 충분한 이유가 있고 저것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반드시 관철해야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하면, 당장 들리는 소리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말. 정중함마저 상대에 대한 기피의 또다른 표현이었음을 알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심하면 신앙마저도 '내 편'끼리만 통하길 바라니,  하느님의 복도 '내 편'에게만 내리기를 기도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싶어 생각만해도 씁쓸하다.

 

박가분도 지적했지만, 일베의 태동 근거는 진보 좌파가 '오버'했던 2008년 촛불시위다. 진보좌파의 성찰을 위해서도 촛불시위는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 시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일부 진보 좌파의 과욕 또는 가벼움이 진보 좌파의 책임윤리에 대한 의구심 촉발과 더불어 촛불을 소멸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진보와 일베를 같은 선상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점도 흥미로웠다. "선동만 있을 뿐 팩트는 없는, 표현의 자유만 있을 뿐 책임은 없는" 사람들. 어떤 일베 회원은 "좌파들은 스스로를 '자신만이 정의', '깨어 있는 시민', '우파는 수구꼴통'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한 피해의식은 역공을 시작했고 "계속 당해왔던 이 공격은 이제 부메랑이 되겠다. 당신들이 신성시하는 김대중을 까겠다, 노무현을 까겠다, 민주주의를 까겠다. 너네들의 이중성이 꼴 보기 싫으니까. 똑같은 방법으로 더 악랄하게 그리고 당신들의 무적의 무기인 표현의 자유로 공격하겠다."고 결심, 선언하는 지점에 다다른 것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나 역시 이런 이유가 "그들의 호남인에 대한 능멸과 저주"를 어떤 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뒤집어 쓴 괴물 가면에 따라 내가 괴물이 되어가고 나의 괴물 가면을 쓰고 괴물처럼 행동하는 나를 대하는 이들도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현상. 과연 "누군가를 혐오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우리가 아무리 싸가지와 도덕과 화합을 강조하더라도 분노할 땐 뜨겁게 분노해야"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나는 '심판'이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진보를 골병들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정권 심판론에만 의지하다 보면 독자적인 의제 설정이나 정책 생산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심판을 외치는 와중에서 싸가지의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민주당의 '심판'은 반대편만을 향할 뿐 자신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마법의 주문이다. ... 민주당이 언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에 대한 심판, 즉 성찰을 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비합리적 몰입 강화가 자주 일어난다. 양육권 싸움, 파업, 합작사업 청산, 입찰경쟁, 소송, 가격전쟁, 인종갈등, 그 밖의 수많은 분쟁들이 순식간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강화 요인들, 즉 승리에 대한 희망과 초기 전략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욕구, 상대방을 이기고자 하는 욕망 등이 결합하면 종종 상식은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다." - '협상 천재' / 디팩 맬호트라, 맥스 베이저먼 지음 -

 

 "순문학이나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받는 작품은 꼬박꼬박 챙겨봤어도 KBS에서 8시 반마다 하는 일일연속극은 오그라들어서 절대 못 보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진보가 안고 가야 할 대상은 도리어 연속극을 보며 하루를 정리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가. 연속극 시청자의 눈으로는 진보세력이 오합지졸에 갈등을 조장하는 패륜아들처럼 보엿을지 모르겠다. 빤해 보이는 일일연속극의 시청률이 왜 높은지, 대중문화에 대한 감수성을 이해하는 게 정치에서는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공이 울타리 밖을 넘어섰을 때 환영받을 수 있는 건 야구에서만이 아니다. 진보정치에서도 그런 짜릿한 장면이 자주 연출되길 바란다."

 

사업을 하건 학생을 가르치건 악기를 연주하건 바이러스를 연구하건 사제이건 경찰이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지식의 바탕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시작되는 것 아닌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으려면 우선적 성찰은 필수다. 이 난리 와중에 성찰이라는 단어를 언급해준 저자가 얼마나 고맙던지.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볼줄만 알았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격한 물살에 휩쓸린듯 균형을 잡지 못한 채 한쪽으로 쏠리진 않았을텐데 싶어 마음이 불편하다.

 

가급적 도덕주의는 피하되 도덕은 갖는 게 좋다. 그런데 어찌된게 우리 사회에선 도덕은 박약하고 폄하되는 반면 도덕주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도덕은 자신을 향하지만 도덕주의는 남을 향하기 때문이다. 남을 단죄할 땐 도덕주의의 칼을 쓰고, 자신의 처신은 도덕을 초월하는 풍토가 만연되어 있다.  
어떤 정치적 제도의 도입에서 계파 간 이해득실을 고려하는 것을 악으로 몰아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건 정치가 아니라 종교다. 다른 계파들도 해볼 수 있다는 최소한의 자신감을 갖게 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더이상 미룰 수 없는 벼랑 끝에 섰기 때문이다.

 

"적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패한다 輕敵必敗之理."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다. 이 말 이상 민주당과 진보에 좋은 말이 없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상대편을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보수를 숭배하거나 존경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마음과 자세의 터전 위에 서야만 민심을 제대로 읽는 눈이 트여 집권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집권 후에도 성공할 수 있다.

 

누구 말마따나 종교인으로 살아가면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내 '직함'의 무게를 가늠해볼 때마다 그리 맘이 편치는 않다. 다만, 그 무게가 타인이 아니라 나만을 누르고 다그치기만을 바랄 뿐. 이 책 역시 타인을 다그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를 다그치기 위해 쓰였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책이 미치는 영향도 우리 모두를 다그치는데 미치기를 바란다.

'雜食性 人間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의미의 축제  (0) 2015.02.26
용서라는 고통  (0) 2015.02.21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0) 2015.01.26
여자 없는 남자들  (0) 2014.12.31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0) 2014.11.2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