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루카 10,17 주님의 이름 때문에... #dailyreading 본문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루카 10,17)
‘주님 이름’ 때문에 나에게 복종했음을 아는 것.
내 능력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치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사자 가죽을 쓴 당나귀 이야기를 이솝우화로 읽으면
그런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지만
정작 자신이 그렇게 사는 줄은 잘 모르는 게 인간이다.
세상만사가 내 덕이 아니라 누군가의 덕분인데도…
오늘도 여느 토요일처럼 근처 본당에 미사를 갔다.
반대편 골목 멀리서 자매님 두 분이 성당 입구를 향해 오고 계셨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걸었고 나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였으니 당연히 성당으로 올라갔으리라 생각했는데
계단 앞에서 방향을 틀려고 고개를 드니 소리도 없이 두 분이 거기에 서 계셨다.
(아마도) 처음 보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시며 인사를 건네셨고,
먼저 올라가시라고 팔을 계단 위로 흔드셨다.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먼저 올라가시라고 대답했지만 내게 돌아온 대답은,
"수녀님이시니 당연히 우리보다 먼저 올라가셔야지요."
경험상 더 이상의 거절은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에,
인사를 나누며 함께 올라가는 방법을 택했다.
올라가는 계단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명치에서부터 후끈 올라오는 부끄러움의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성당에 조용히 앉아 열을 식히며 돌아본다.
더 받은 것을 생각하니 포기했던 것들이 그리 아쉽지 않다.
더불어, 더 내어놓아도 무게추가 쏠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지난 쇄신회 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진정으로 좋은 것을 찾으려면 때로는 좋은 것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아가 침묵과 고독을 견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워내는 자리, ‘나의 수비아꼬’에 머무르는 데에 있어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피정을 하는 동안 가장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적어 보았는데 너무 많았다.
수술 후유증, 어지럼증, 소임 조건, 내 십자가, 여유 시간 부족으로 책 읽는 시간이 없음, 관절염으로 인해 악기를 연주할 수 없음, 월피정에도 밥당번을 해야하는 것... 등등등
잔뜩 적고 나서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아픈 몸 때문에 얻은 것도 있고, 쉴 틈 없는 소임이지만 새벽에 본당 수녀님들보다는 좀 더 잘 수 있고, 책 못 읽는 지금 소임은 이제 1년 정도 남았고 등등 영영 잃은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위로가 분명 있었다.
이렇게 따져보니 비교하고 불평불만하는 나 자신이 가장 방해가 되는 것 같다.
나만 생각하면 십자가 무게가 어마어마한데, 주위를 둘러보면 또 고만고만한 무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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