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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르 9,2-10 사순절의 사랑은 (나해 사순 제2주일 레지오 훈화) 본문

마르코의 우물/마르코 9장

마르 9,2-10 사순절의 사랑은 (나해 사순 제2주일 레지오 훈화)

하나 뿐인 마음 2024. 2. 24. 23:26

 
미국 본당에서 일할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입양된 한 소년이 사춘기가 되어 방황을 심하게 하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갔습니다. 추운 겨울, 아들을 데리고 산을 넘고 넘어 도착한 곳은 산과 산 사이의 벌판 같은 곳이었는데 일부러 찾으려해도 어려울듯한 그 곳에 도착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전쟁 당시 대오와 떨어져 혼자 죽을힘을 다해 산속을 헤매던 군인에게 눈 덮인 산속 어딘가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자신도 길을 잃어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얼마 후 아기와 엄마를 발견했습니다. 한 젊은 어머니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아기를 살리기 위해 눈밭에서 옷을 모두 벗은 채 자기의 체온을 아기에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옷으로는 더 이상 그 추위를 막아줄 수 없었기에 자신의 체온으로라도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였고 얼마 못가 그 여인은 죽고 아기는 엄마의 체온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 군인은 그 앞에서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당신의 아이를 입양해 최선을 다해 키우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 역시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서 아기의 체온으로 결국 살아남았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아기와 군인은 서로를 살렸습니다. 
 
처음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던 그 사춘기 소년은 그 자리에서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칼날처럼 에이는 눈바람을 맞으며 어머니를,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을 살린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눈바람 속에서 옷을 벗고 어머니의 사랑을 느껴본다는 그 아들이 제 정신으로 보이겠습니까. 굳이 그래야 하는가 싶고, 무모해보이기도 혹은 어리석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게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어쩌면 아들은 죽어가면서까지도 자신을 살려낸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묵묵히 기다리며 엇나가는 자신을 다그치기보다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버지의 사랑도 느끼지 않았을까요. 사순시기는 이렇게 일부러 추위를 맨몸으로 느끼며, 죽어가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껴보는 시기입니다.  나아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가 존재만으로 군인을 살릴 수 있었듯이, 비록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싶을 때에라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또한 깨닫는 시기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당도 잘 다니고 죄도 짓지 않고... 나름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성당에 와서 함께 이마에 재를 바르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평일 미사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그래야 하냐고 물어온다면, 실은 버젓한 대답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그렇게 도망치다가 결국 수녀원에 가게 된 이유를 조리있게 설명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같기도 합니다.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내 나름 기도도 하는데 굳이 함께 모여 미사를 드리고, 활동을 하고, 연습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그래야 하는 거냐면 그래요, 무슨 대답이 필요하겠냐 싶습니다. 그런데 더 설명하기 어려운 건, 굳이 나와서 기쁘게 시간을 내어놓고 각자의 재능과 노력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성당에서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뭐 큰 칭찬을 받거나 출세길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못나오겠다는 분들을 이해시키는 것보다 나오는 분들의 기쁨을 '설명'하는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힘든 일입니다. 다만, 그게 '사랑'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번 주일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마르 9,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께서 변화하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따라나서며 변모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당장 바꾸기보다 당신의 변모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변하라고 명령하거나, 변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신 것은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다림입니다. 그러니 이번 주는 서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께, 나를 살리신 예수님께 한 걸음 더 다가가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변모해가시길 또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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