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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하느님이 마련하시는 딱 그 만큼만 본문
피정을 하러 들어왔다. 만나고 싶었던 언니 수녀님을 만나 피정을 시작하기 전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었고, 잠들기 전 아직은 낯선 성당에서 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무릇 하느님의 일이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순리처럼 혹은 일사천리로 이뤄진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입회를 결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척척 맞물려 돌아갔을 때가 그랬다. 거대한 미로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 레일 위에 놓인 기차를 탄 기분이었달까. 그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경로대로 가는 기차가 하느님의 뜻 같았다. 그래서인지 내 본디 신앙보다 더 큰 믿음으로 두려움이나 의심 없이 따라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어쩌면 그땐 유아기적 신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홍해 앞에 섰다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 내가 홍해를 건넜으면 적(敵)은 홍해에 빠지는 것만이 진리처럼 여겨지던 때.
문 앞에 도달하면 당연히 문이 열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던 시절은 지났다. 문 앞으로 가는 것도 쉽지 않고 그 방향을 안다고 하여도 그곳으로 난 곧은 길만 걷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굽은 길을 갈 때도, 험한 길을 갈 때도, 돌아돌아 나아가야 할 때도, 곧장 갈 수 없을 때도 있다. 문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고, 벽이 허물어져 길이 나는 때도 있고, 돌아서야 열리는 문도 있고, 닫아야 하는 문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길 위에서, 그런 문 앞에서 이 길이 아니라고, 이 방향이 아니라고, 이 문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것. 이끄시는 방향대로, 보채시는 시간에, 허락하신 곳까지만 가는 것이 내 삶이요, 주님 섭리임을 차차 깨달으며 살아간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가 아니라 14처로 완성된다. 14처 모두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각각의 처를 모두 걸어내셔야 했다. 이 나이엔 이런 소임이 당연하다 여기고 이 정도 했으니 어느 정도는 주어져야 한다 생각하고 스스로 관면을 허락하고 사는 삶은… 길이 아니라 낭떠러지겠지. 하느님이 마련해주시는 길만을, 하느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하느님과 함께 갈 것. 그것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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