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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아무튼, 연필 본문

雜食性 人間

아무튼, 연필

하나 뿐인 마음 2022. 8. 17. 14:58

김지승 지음. 제철소.

어릴 적 나의 연필은 언제나 아버지가 깎아 주셨다. 학교를 다녀오면 연필심이 길고 정갈하게 깎인 연필들이 가지런히 통에 담겨 있었다. 오래된 화장대 서랍에 연필밥이 소복하게 쌓여가는 걸 지켜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길고 가지런하게 연필을 깎으리라 욕망했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 검정 도루코 칼을 어른의 허락 없이 잡을 수 있으리라. 저 반짝반짝 빛나는 자개 서랍 가득 연필밥을 채울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은 연필을 깎을 때가 아니라 연필심이 뭉툭해지도록 쓰고 또 써야한다는 사실에 조금은 절망하면서. 아버지는 깎고 다듬는 어른, 나는 새 신발을 댓돌에 문질러 닳아나게 하듯 잘 깎인 연필을 공책에 쓰고 또 써서 매일매일 닳아 없어지게 하는 어린이. 아버지에게 나는 연필이었고, 내게도 아버지는 연필이었던 시절. <아무튼, 연필>을 읽으며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 첫 연필은 기억나지 않지만, 문구에 관한 책을 이미 몇 권 읽었지만, 내 첫 연필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아무튼, 연필>이다. 차라리 부서지길 택하며, 각인시키기 보다 흔적 정도를 남기는 삶에 만족하며 검고 조금은 단단한 마음(心)을 품고 살리라.


p.12
"이런 여성들, 청첩장이나 묘비에도 이름을 쓸 수 없는 존재들, 공식적인 기록과 역사에서 지금도 매일 지워지는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서둘러 연필을 쥐었다."

p.27
"어떤 기억은 하루도 예외 없이 달처럼 밤마다 머리 위로 떠올랐다. 한없이 고요할 것 같은 달 표면에서도 긴 시간에 걸쳐 낙석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그럴 때는 위안이 됐다. 낙석의 흔적을 지도화한 ‘낙석지도’를 보고부터는 기억은 달이 아니라 낙석지도처럼 펼쳐진다. 달이 가진 상처의 지리(地理)를 그 지도에서 읽을 수 있다. 달의 낙석지도는 말해준다. 낙석은 달 지진이 원인이라기보다 80%가 소행성 충돌에 의한 결과라고. 달 중심 언어를 사람 중심으로 바꾸면, 그건 대부분 네 탓이 아니라고."

p.46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나는 다이아몬드와 흑연의 구성 성분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처럼 ‘계속 강해 보였던 나’와 ‘그렇게 강하지 않은 나’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어, 하고 놀랐다. 놀랐다는 점에 다시 놀라는 그런 놀람이었다."

p.46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p.49
"다른 것들과 포개지고 더해지고 섞이는 삶을 상상하는 건 무너지고 부서져본 사람들이다. 홀로 단단할 수는 없어서 ‘약한 인간 1’과 ‘약한 인간 2’가 손잡고 ‘좀 덜 약한 인간들’로 살아가는 먹먹함에 대해 아는 것도 그들이다. 몇 세기에 걸쳐 흑연에 점토(주로 고령토) 등을 섞어 강도를 높이고 잘 부서지지 않는 연필심을 만드는 데 투자한 것도 흑연의 약함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어둡고, 가벼우며, 검은 광택을 가진 흑연은 어째서 아름답지 않다는 건가. 과도한 열정 없이 언제든 자유로울 준비가 되어 있는 이 검은 친구가."

p.50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p.59
"기억하는 사람에게만 사소하지 않다."

p.114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p.164 ~ p.165
"자기가 어쩌다 지나는 시절과 시대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요원한 일이다. 젠더와 계급과 인종, 장애 유무와 연령 등으로 조건 지어진,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국경 마을에 사는 듯한 나는 가만히 있어도 선 그어진다. 핑계와 연필, 유언과 시, 묘비명을 남긴 불행한 포유류처럼. 하지만 여자와 코끼리는 잊지 않지."

p.199
"살다가 적지 않은 표본 수가 생겨서 그게 설사 편견이라고 해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는 카테고리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믿음직한 편견으로 자리한 것 중 하나가, 욕심이 분명하고 그걸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는 막내들과 나는 도무지 친해질 수 없다는 거였다. 친구들 대부분이 장녀인 상황에서 이 편견은 내 빨강머리 앤 거부증보다는 지지를 받고 있다(빨강머리 앤의 자의식 과잉과 발화 방식 때문에 가끔 앤 포비아가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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