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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은총 본문

雜食性 人間

은총

하나 뿐인 마음 2022. 5. 4. 08:34

최현순 지음. 바오로딸.

8일 피정 강의로 최현순 선생님의 '은총'을 들었는데 한 번 더 마음에 새기고 싶어서 책으로 다시 읽었다. 강의에서도 책에서도 가장 깊이 남아 있는 것은 '거두어지지 않는 사랑' 즉 hen이다. 내가 당장 햇빛을 느끼지 못한다 해서, 내가 그늘 아래 혹은 동굴 속에 들어 앉아 낙담하고 있다 해서 햇빛이 없는 것이 아니듯, 하느님의 hen은 없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 모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새로운 것은,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내 생각에) 개념을 정리해 둔다.

은총은 신약에 주로 나오는 카리스의 번역이다. 주로 카리스는 은총으로, 카리스마는 은사(은총이 주어졌을 때 우리 안에 생기는 효과)로 번역된다. 반면 구약성경의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카리스로 번역된 단어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헨hen과 헤세드hesed이다.

헨hen은 호의, 매력, 사람을 끄는 힘을 뜻하는데 하느님께서 사람에게(혹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지시는 호의, 총애, 사랑을 뜻한다. 창세 6,7-9에 나오는 '주님의 눈에 들었다'는 표현이 바로 hen이다. 직역을 하면 '하느님의 눈에서 hen을 보았다'인데 '은총을 받았다'는 뜻이 된다. 창세 18,3의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역시 hen이 사용되었다. 이렇게 hen은 하느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눈빛, 마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활동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근본적으로 마음에 품으신 사랑이다. 하느님은 한 번 베푸신 hen을 절대 거두지 않으(이사 49,14-16; 로마 11,11-32 참조)시며 이는 '거저 주시는 사랑'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품으시는 사랑인 hen은 인간에게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현되는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표현된 사랑이 hesed이다. 근본적으로는 '충실함'의 의미를 지니며 은총, 자비, 자애, 선의 등으로 번역된다. 즉 hen은 항상 단수로 상용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근본적 마음이며 일방적 상하관계에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사랑임에 비해, hesed는 종종 복수로 사용되며 그 사랑(hen)의 구체적 행동으로 주로 쌍방 계약 관계에서의 충실함이다. 사무엘 하권 2장 5절의 '충성', 6절의 '자애'가 바로 hesed이다.

그리스어 카리스는 고대 그리스 문화 안에서 '거저 베푸는 선의', '마음에 드는', '기분좋게 해주는'이라는 의미가 있다. 70인역에서 hen과 hesed를 번역할 때 주로 카리스로 번역하였다.


p.35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하느님의 사랑은 늘 거기에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절절히 느끼거나 그 현존을 느낄 때가 있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심지어 온 세상이, 아니 내 안의 모든 것이 들고 일어나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사실 하느님의 현존은 종종 너무 약하다. 그야말로 ‘상처받기 쉬운’ 현존, ‘참으로 부서지기 쉬운’ 현존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오해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하느님은 내가 거부할 수 없도록 강압적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당신의 현존 여부를 나에게 의존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에서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며 문 밖에 서계시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처럼 약한, 또는 약해 보이는 하느님의 현존이기에 우리는 그 현존을 못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 현존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헨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 설사 우리가 감각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나를 바라보시는 사랑의 눈빛, 그 눈빛에 들어있는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다. 어떠한 경우에도 헨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p.36
"하느님의 헨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게 해주는 힘이다. 헨이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빛이라면, 내가 나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든 비참한 사람으로 여기든 하느님은 나를 항상 귀하게 바라보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실 하느님은 내가 비참할 때 더 나를 귀하게 바라보신다. "

p.41
"은총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은총을 받을만하다’라는 식의 사고를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동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p.44
"하느님이 헨을 주실지 마실지는 오롯이 하는님의 자유에 달려있다. 헨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헨을 주기 위한 동기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 그런데 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길을 알려주시면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게 된다. 이렇게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 편에서 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것을 보시고 다시 우리에게 더 큰 헨을 주신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 인간 편에서의 어떤 행동, 그리고 다시 주어지는 헨, 이렇게 은총과 인간의 행동, 또는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는 어떤 역동성이 있다."

p.46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은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어떤 눈빛, 태도, 말투, 행위 등은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온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품으시는 사랑인 헨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표현된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가 헤세드다."

p.57
"성경에서는 은총에 대한 개념을 내게 좋은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등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업적을 가리킨다."

p.81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하느님 은총을 두 측면으로 구분하였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 곧 하느님의 자녀 됨, 하느님 앞에 흠 없이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은총을 가리켜 고양은총(gratia elevans), 그리고 죄를 용서하는 은총을 치유은총(gratia sanana)이라고 불렀다. 죄가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에 죄의 용서란 곧 치유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p.89
"우리의 죄스러운 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에 매몰되기보다는 그 죄를 넘어 하느님께서 청지 창조 이전에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궁극적 목적지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 그리고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우리를 그 목적지로 이끄시는 하느님, 당신 아들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 우리는, 우리 죄의 의미를 오히려 더 잘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죄에 머물지 않고 그분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p.89 ~ p.90
"죄의식을 강조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마련하신 것이 무엇인지, 내가 도달하게 될,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분명히 마련하셨다고 하는 그 행복, 그리고 그것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활동을 먼저 보고 그 빛으로 나의 죄를 볼 때 우리는 죄에 짓눌림 없이, 죄로 인해 숨 막혀 하지 않고 사도 바오로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p.114 ~ p.115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서 혹은 우리 안에서 작용하실 때 우리의 내면은 마치 무생물처럼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활동하실 때 우리 안에는 어떤 효과, 어떤 결과가 생겨나는데 이 결과는 하느님 자신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당신 자신을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 그리고 이 은총이 우리 안에 주어짐으로 우리 안에 생기는 어떤 변화를 가리켜 ‘창조된 은총(gratia creata)’이라고 구분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 안에 현존하시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연을 건드리면서 어떤 새로운 표시를 남기고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신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p.124
"우리에게는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만한, 그 은총과 교환 가능한 공덕이 없다. 은총이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p.153 ~ p.154
"영광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삶과 인격과 사명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분의 선하심과 구원하심, 하느님 자신의 현현인 것이다."

p.161 ~ p.162
"예수님께서는 특히 당신의 생활 양식과 행적을 통해서 사랑이 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힘 있는 사랑, 인간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그의 인간성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다 포용하는 사랑이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과 불의와 빈곤에 접했을 때 인간의 물리적 도덕적 한계와 취약성을 여러 가지로 드러내주는 역사적 ‘인간 조건’ 전체에 접했을 때입니다. 이 사랑이 자체를 드러내는 모습 또는 영역을 가리켜 성경 용어로 ‘자비’라고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p.162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자비란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양상 혹은 양태(modus et ambitus)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나타났다. 말씀과 행적, 삶, 특히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왔음이 드러난다."

p.189 ~ p.190
"구원은 내가 얼마나 선행을 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일생을 고행과 자선, 사랑을 실천했던 성인들도 임종 때에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를 구했다."

p.196
"모든 선행은 은총의 열매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 선행을 마치 우리의 공로인 것처럼 여겨주시는데 이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선행을 쌓은 만큼 천국의 높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다."

p.205
"우리는 자유를,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혹은 서로 상반되는 것들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자유의 깊은 뜻이란, 자기 본성의 실현, 자기 결정이고 ‘참으로 자신이 되는 것’이다. 곧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닌 그런 것이다. (Donath Hercsik)"

p.206
"참된 자유는 단순한 선택의 자유와는 구분되고, 자유방임적 자유하고는 더더욱 다른 것이다. 사실 자유방임적 자유는 철학에서도 참된 자유로 간주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마약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계속 마약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계속 마약을 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런 행위를 ‘참된 자유’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결국 그의 육체와 정신을 망가트리기 때문이다. 참된 자유란 인간의 본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p.207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고 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선택, 나의 행동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나의 본성을 완성에로 이끄는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만약 어떤 선택과 행동이 그 목적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역행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선택은 참된 자유가 아니다. 그리고 은총이야말로 참된 자유를 선사한다."

p.215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줄곧 인간의 구원이 오로지 은총에 의해 이루어짐을 강조해 왔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을 뵙는 것, 곧 지복직관을 향해 나아가는 이 영적 여정의 주도권은 항상 하느님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꼭두각시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은총의 이끄심에 협력한다. 물론 협력할 수 있는 것도 은총이지만 인간이 이 은총에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여전히 존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p.219
"하느님은 각 사람의 고유한 인격을 무시하고 은총을 일방적으로 덧입혀 주는 방식으로 활동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은총이 본성을 전제하고 완성한다면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바로 그 나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만약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p.220
"“나는 원래 그래! 그냥 내버려 둬!”라는 말은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요 성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그런 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도 부족하다. 하느님이 만드신 나는 ‘참 좋은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충만한 완성’에 도달한 상태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창조된 본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현재 왜곡되어 있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 식별하고,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면서 여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도록 나를 개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곡된 모습 자체는 이 여정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습을 인정하는 거기에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은총도 풍요롭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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