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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하신 하느님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잔인성, 성, 폭력- 본문

雜食性 人間

모호하신 하느님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의 잔인성, 성, 폭력-

하나 뿐인 마음 2021. 12. 25. 22:46

토마스 뢰머 지음. 권유현, 백운철 옮김. 성서와함께.

우리는 남성 위주이며, 잔인하고, 전제적인 하느님, 심지어 인종 청소부인 하느님을 오늘날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믿을 수 있을까? … 내가 믿는 하느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설명해내기 위해 읽었는데 그간 답답하던 것들에 단 번에 답이 주어지진 않지만, 그래도 한 번씩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좋았던 책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이 책 역시 분명한 답보다 어떻게 방향을 잡고 어떤 길을 피해야 하고 무엇을 확인하며 가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었다. 성경 읽으면서 답답한 적이 있었던 분들은 한 번씩 읽어보시라 추천하고 싶은데, (나는 수녀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지금은 절판이다.


p.21
"현대인이 구약성경에서 언급되는 하느님에 관한 일부 진술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구약성경을 무차별적으로, 시대와 상관없이 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역사와 문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구약성경의 증언을 읽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하느님에게는 특정한 역사가 있다. 그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p.82 ~ p.83
"우리는 양식 있는 인간의 이상에 부합되는 하느님을 원한다. 즉 공정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신 하느님, 더욱 정확하게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신 하느님을 원한다. 인간의 이상이 만들어 낸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느님은, 성경을 쓴 저자들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우상이 될 위험이 있다. 우상이란 아무리 정당한 갈망일지라도 인간의 갈망을 정당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p.93
"이름의 변화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까지의 탐색을 나름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조상이 누구이며 무슨 지파라는 것에 의해 규명되던 정체성은 의문에 부쳐지고, 다른 정체성 즉 앞으로 정의해 나가야 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p.96
"우리는 신학적 담론에서, 설명할 수 없는 성경의 하느님을 부정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p.97
"인간이 기술한 위대한 종교적 본문들에는, 종종 뚜렷한 이유 없이 하느님이 인간을 괴롭히시는 이야기가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그 본문들은 인간에게 자기 존재의 유약함과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개념의 취약성을 상기시킨다. 잔인하다시피 할 정도로 모호하신 하느님 앞에서, 신앙인이 취할 수 있는 해답은 오직 하나다. 곧 욥의 학파에 합류하는 것이다. 욥은 놀랍도록 대담하게 하느님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순간에도,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욥 19,25)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고 또 하느님에게 맞서는 경우에도 하느님에게 호소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있다."

p.99 ~ p.100
"구약성경에는 전쟁의 하느님, 절대 봉건 군주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런 본문을 하느님이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 전투를 요구하신다는 등 ‘영적’ 의미로 일반화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전쟁의 하느님을 배척하고 그 하느님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랑의 하느님을 대립시킨다면 그 또한 신학적으로 탐탁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전투적이며 전제 군주이신 모습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는 태도는 특히 신명기에서, 그리고 여호수아기의 정복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p.106
"여호수아기를 근본주의 시각으로 읽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의심스럽다. 첫째, 여호수아기의 이야기들을 역사 문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둘째, 전쟁의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성경의 믿음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한다."

p.110 ~ p.111
"우리는 히브리 성경에 나타나는 호전적 하느님의 모습에서 중압감을 느낀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성경을 다시 읽어 보면 그 모습은 수정되거나 비판되어 상쇄된다는 사실을 즉각 강조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자신만만한 전쟁의 하느님이라는 생각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면서 여호수아기의 서론은 제2, 제3 세대 신명기계 편집자들에 의해 재검토되고 수정되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들었던 군사적 연설은 율법 설교로 변하였고, 여호수아는 군대의 지도자에서 성실한 라삐로 바뀐다."

p.116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전쟁 이야기가 성경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반대의 말을 해도 놀랄 것이 없다. 인류 역사 내내 전쟁은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기록으로 만족하는 태도나 하느님에 관한 성경 이야기를 통째로 거부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전쟁 전승을 유배 중에 다시 읽으면서 모든 정복 이야기를 승리주의에 입각하여 활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역사는 그런 일을 저질렀다. 여호수아기는 아메리카에서 인디언을 말살하거나 남아프리카에서 백인 집단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경 본문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무기는 그것이 전달된 복합적인 역사를 고려하면서 본문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뿐이다."

p.120 ~ p.121
"아브라함 전승군. 신명기와 역사서의 본문들과 반대로, 성조들의 이야기는 이웃 나라 백성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거의 평화주의라고 일컬을 정도로 평화로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조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에게서 전쟁을 즐기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창세기에서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 가운데 있는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준다. 다른 민족들은 비판받지 않는다. 그들이 우상 숭배를 한다고 언급하지 않고, 심지어 다른 민족들도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내밀한 관계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랍 종족의 조상인 하가르도 광야에서 하느님이 보내신 사자를 만나며, 하느님은 하가르의 편을 들어 개입하실 것이다. 아브라함 전승군은 그 나라 백성이 이웃 나라 백성 틈에서 짓눌리지 않고, 또 홀로 땅을 소유하지 않은 채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보여 준다. 아브라함 전승군의 하느님은 여러 다른 민족 간에 친목을 원하시는 평화로운 하느님이다. 히브리 민족의 역사가 정복의 하느님에 관한 모든 담론을 대번에 상대화시키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 위에서 출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p.123 ~ p.124
"성경 안에 호전적 본문이 있다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전사인 하느님이 결코 준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사실 히브리 민족의 서사시는 반호전적 하느님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페르시아 임금들의 하느님인 동시에 유다 백성의 하느님이신(2역대 36,23) 보편적 하느님,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평화의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역대기로 끝을 맺고 있다."

p.125
"개인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하는 많은 현대인에게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인간이 준수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 수많은 율법을 선포하는 도덕주의 신으로 자주 비쳐진다. 오경에 집성되어 있는 이 율법은 제한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지니며 인간이 늘 죄인임을 이해시키는 데 목표를 둔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이렇게 구약성경을 비난하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히브리 성경을 신약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투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기원부터 죄인이고 첫 번째 부부의 잘못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관념을 퍼뜨리는 것이다. 바오로 서간(로마 5,12-21; 7,13-23 참조)에 전개된 이 ‘원죄’론이 히브리 성경에 참으로 존재하는가?"

p.130
"성경의 인간학에 의하면 인간은 로봇이나 꼭두각시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하느님 앞에서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 자유는 하느님의 계명을 위반할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나아가 참으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분리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없으므로 동산을 떠나 자신에게 맞는 공간에 정착해야 한다. 계명을 위반하면서까지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수용하도록 부추기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

p.131
"창세 3장은 흔히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해해 온 것처럼 본래 ‘원죄’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더욱이 ‘죄’라는 말도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인류의 첫 번째 살인과 관련하여 창세 4장에서 사용된다). 소위 타락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인간을 짐승과 하느님에게서 구별하는 요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짐승에 대하여 인간은 번식에만 제한되지 않는 성적 특성으로 구별된다. 하느님에 대하여 인간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죽어야 하는 처지로 구별된다. 동산을 떠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데 필요한 과정이다."

p.147
"창세 4장에서 하느님은 카인에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은 겪어야 할 불공평을 직면하게 하신다. 그런데 창세 4,5에 의하면, 폭력은 카인이 불공평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하느님이 차별대우를 하셨다고 해서 인간 카인을 거부하시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사실은 하느님이 카인에게 말을 건네시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p.147
"창세 4,7을 보면, ‘죄’라는 말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성경 본문에 의하면 ‘원죄’는 ‘사과 이야기’, 즉 창세 3,6에 나오는 하느님의 금기를 위반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죄는 폭력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하느님은 카인의 책임감에 호소하시며, 그에게 폭력에 굴복하지 말라고 격려하신다."

p.158 ~ p.159
"시편 58편 저자는 다른 시편에서처럼 여기서 자기의 적과 하느님의 적을 동일시한다.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관심과 하느님의 관심을 동일시하는 것은 광신狂信과 끔찍한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시편 저자가 폭력 행사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시편 58에서 온갖 잔인한 모습이 나오는데도 정의가 복권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복수하고픈 자신의 욕망을 하느님에게 넘기게 되면 일종의 정화 작용을 거치게 된다. 그는 그 복수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게 된다."

p.161
"악의 개입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그 악을 우리의 적절치 못한 행동에 대한 벌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을 최고의 교육자로, 또 모든 불행은 마땅히 받아야 할 불행으로 이해하게 된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마치 하느님과 악이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히브리 성경의 저자들은 그런 사고방식이 갖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p.163
"사람을 두 부류(의인과 악인)로 나누면, 모든 불행을 ‘합리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불행은 죄인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벌일 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164
"이 세상의 지혜에 대한 견해는 낙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혜란 관찰과 교육을 통해 현인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지혜는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둔다. 현인은 자신의 지혜가 도달하는 한계를 잘 알고 있다."

p.168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유다교 신앙에 한정된 특성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욥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정해져서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그를 아라비아의 어디쯤에 갖다 놓는다. 그곳은 사막의 가장자리이며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의 경계로, 그곳에서는 질서의 세계가 무질서에 의해 위협받는다. 욥과 하느님이 만나게 되는 곳도 이런 계열적 틀 안에서이다."

p.174
"코헬렛의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따라서 ‘쓸모 없는’ 하느님에 관한 주장은 이데올로기가 된 사상, 하느님을 제 것으로 만들려는 신앙과 대립된다."

p.175
"유다교에서 코헬렛을 정경 목록에 포함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간다. 자기 백성에게 모습을 보이고 토라와 계명을 통해 백성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성조들의 하느님, 또 탈출기의 하느님과 코헬렛의 하느님은 너무나 동떨어진 분 같아 보인다. 그런데도 코헬렛과 욥기가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유다교가 ‘모호하신 하느님’이라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 현실 뒤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제기되는 신학적 문제인 하느님과 악의 연관성이 숨어 있다."

p.187
"히브리 성경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온 인류에게 소개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늘 질문하시고,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 하시며, 너무 길들인 신학적 담론에 대해 언제나 의문을 제기하시는 분이다."

p.187
"히브리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의 하느님이 ‘좋으신 하느님’으로만 축소될 수 없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신앙고백을 승리주의나 자기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악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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