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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본문

雜食性 人間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하나 뿐인 마음 2020. 2. 3. 10:38

정세랑 장편소설. 민음사.

 

맑다는 건 뭘까. 예전 어떤 신부님이 '눈 맑은 스승이 그립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눈 맑은 스승이 이제 많지 않다는 씁쓸한 말이었을까. 젊은 패기에, 나도 맑은 눈의 수도자가 되고 싶다는 원의를 품었었다. 요즘은 너무 멀리 왔나 싶어 마음이 무너지다가도, 지금이라도 쓸데 없는 것들에서 눈길을 거두고 잠시라도 욕심과 마음의 짐 내려놓고 고요히 눈을 감는 시간을 좀 더 가진다면, 부유물들을 가라앉혀서라도 좀 맑아지지 않을까 또 다른 원의를 품어본다. 이 소설은 독자인 나를 맑은 물로 채워주면서 내가 더 맑아지도록 해준다, 채워서 맑게.

 

초반에도 마음을 붙드는 구절들이 많았는데, 놓쳤다. 너무 재밌기도 하고 읽을 수록 '나도 이렇게 맑아지고 싶다'는 아이러니한 욕심을 부리게 되면서 문장들을 남기지 못했다. 당장 더 진도를 나가고 싶은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시적 문구들은 아니니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되겠다는 좀 허황한 이유를 대기도 하면서 말이다. 책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두 문장을 겨우 남겼는데(책이 끝나가니까 이야기가 너무 아쉽고 문장 하나하나까지 아까웠으니까), 이 책에 나오는 무심하고 그럭저럭한 어른이 바로 나구나 싶었다. 당장 하고 싶은 일들에 넘어가 기회를 자꾸만 놓치며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버린 어른...  그제서야 말이다.

 

리뷰를 쓰려고 컴 앞에 앉았더니 선하고 맑은 마음으로 작은 일을 허투루 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세속 가치로는 별볼일 없어 보인다 판단했던 사람들이 묵묵히 지켜낸 세상에 살기 위해 좀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싶어졌다.

 

덧붙이고 싶은 한 가지가 있는데, 엔딩이 사랑이었던 것도 좋았다는 것. 언젠가부터 (무분별한) 러브라인이 없는 이야기가 더 좋은 이야기라는 강박 같은 걸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게,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착하고 욕심 없는 태도에서 저렇게 조금씩 싹트는 게 아니겠는가 말이다. 


"선한 규칙도, 다른 것보다 위에 두는 가치도 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 특유의 탁함을 은영은 견디기 어려웠다."

"은영은 말했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거절도 할 줄 아셔야 해요. 과도한 업무도 번거로운 마음도 거절할 줄 모르면 제가 아무리 털어 봤자 또 쌓일 거예요. 노, 하고 단호하게 속으로라고 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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