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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食性 人間

사하맨션

하나 뿐인 마음 2019. 9. 17. 15:58


조남주 지음. 민음사.

묵시록처럼 모든 게 무시무시한 비유 같은 이 책이 적나라한 현실을 한 점도 놓치지 않고 낱낱이 까발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묵시록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이들의 눈을 피해 비유와 상징으로 쓰여졌지만 그 책을 읽는 신자들은 모두가 그 비유를 현실로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비유와 상징들. 게다가 그 비유와 상징들을 모아 이어보면 미사라는 가톨릭의 가장 중요한 전례인 미사를 드러내는데, 이 책 역시 사하맨션 주민의 입장인 이들은 이 sf소설이 조금도 허구가 아님을 알아들을 수 있다.

더욱 놀라웠던 건 문장이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것.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팠고, 내가 알던 이들의 얼굴이 많이 떠올랐다. 하나하나, 때론 무리지어.

풍족하게 누리며 생각없이 타인을 짓밟기도 하고 우월한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살아간 이의 유치하고 편협한 생. 앗기고 밟히며 누추하고 낮은 자리만 맴돌았지만 형편에 맞게 타인을 돌볼 줄도 알고 스스로를 돌아볼 줄도 아는 생. 그리고 나의 생.


"이상한 일인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서 상식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상식을 의심해야 했다."

"“힘 함부로 쓰지 마. 여자 다루듯이 부드럽게 돌리란 말이야.”
“영감 모가지도 부드럽게 돌려 줄까? 그딴 헛소리 하나도 안 웃겨.”"

"두렵고 더디고 힘들게 도착하고 보면 늘 더 못한 자리. 맨션 사람들은 어려지고 유치해지고 단순해졌다."

"배려는 곧 무관심이 되었다."

"영감은 자잘한 물방울들이 뿌옇게 맺힌 관리실 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떠밀리듯 모인 물방울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가느다란 물줄기가 되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창 너머의 이아는 오래된 영화의 회상 장면처럼 아른거렸다. 일상은 영화와 달라서 언제나 어울리지 않는 배경 음악이 엇박자로 깔리기 마련이다. 이아의 귀에 들려올 소리들이 짐작되어 진경은 명치께가 아팠다.

"그때 진경은 맨션의 다른 사람들처럼 덮어놓고 이아 엄마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센의 합리적인 의문들마저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고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으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우미는 맹수를 키운 힘이 분노가 아니라 외로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경력이 쌓이면 더 예민해지고 노련해지죠. 암기력이나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예요. 오류가 발생한다는 건 감정이 개입했다는 뜻이에요.”

"너무 많이 알게 되어서, 그리고 그걸 다 기억해야 해서 괴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잊지 않아야 한다 망각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감수했다. 잊지 않는 일, 증언하는 일, 기록이 되는 일, 기쁜 일을 오래 기뻐하고 슬픈 일을 오래 슬퍼하게 하는 일. 하지만 자신의 기억이 원하는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어 가치 있게 끄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여자의 정확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노력 없이 얻은 것으로 살아왔다. 잘 살았다. 그렇게 잘 살아오는 동안, 키가 크고 근육이 단단해지고 힘이 세지는 동안, 마음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성장의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늙었다. 늙고 나약해졌다. 우미는 갇히는 것도 두려웠지만 사실은 내쫓기는 것이 더 두려웠다."

"이 씨앗들은 어디서 날아온 걸까. 우미는 그 시절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던지고 깨뜨렸던 열매들.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숱한 바람과 비와 눈을 견디며 떠돌다 다시 우미에게 돌아왔다."

"무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바쁘고 불안해서 스스로 해내고 싶은 별것 아닌 일들이 있다. 단단해서 굳어 버린 병뚜껑을 돌려 여는 일. 지저분하게 붙은 스티커를 떼어 내는 일. 엉뚱한 곳에서 묶인 매듭을 푸는 일. 진경은 지금 담뱃불을 붙이는 일이 소장에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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