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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정원가의 열두 달 본문

雜食性 人間

정원가의 열두 달

하나 뿐인 마음 2019. 9. 11. 15:47


카렐 차페크 글. 요제프 차페크 그림. 배경린 옮김. 조혜령 감수. 펜연필독약.

요 근래 너무 재밌게 읽는 책. 가드닝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일년 내내 가드닝에 푹 빠진 카렐 차페크의 하루하루에 관한 책이다. 식물 덕후의 일상을 낱낱이 드러내는데, 가녀리고 자잘한 한 식물 한 포기 안에 깃든 생명까지 발견하고 받드는 삶이니 보기에 유쾌해도 가벼울 리 없고, 모든 걸 드러내보인다 해도 얕지 않다. 너무 상쾌하고 재밌고 생기발랄한 책인데, 문장마다 고요하고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소년들은 정원에서 땀방울을 흘리기보단 소녀의 꽁무늬를 따라다니거나 자신의 야망을 쫓고, 직접 키우지도 않은 인생의 열매를 무분별하게 따 먹는다. 그 행동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나흘째, 자라나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잡초 아닐까 하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된다. 화분에서 처음 자라난 꺽다리는 백발백중 잡초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다."

"나는 줄곧 식물이 씨앗 아래쪽으로 뿌리처럼 자라 내려가거나, 씨앗 위쪽을 향해 감자 줄기처럼 자라 오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식물은 씨앗 아랫부분에서 움튼 다음, 씨앗을 모자처럼 머리에 쓴 채 고개를 밀어 올린다. 머리에 이마를 이고 자라는 아이의 모습을 그려보라. 자연의 신비다."

"꼭 창턱에 제라늄이나 씨-어니언 한 포기를 기르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내면 깊은 곳에 농부의 품성 한 조각을 지니고 살아가나 보다. "

"하나가 피면 늘 하나가 진다. 그러면 “너도 다했구나.”라고 중얼거리며(꽃에게 하는 말이다) 시든 줄기를 자른다. 저 꽃들을 보라, 실로 여인을 닮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생기가 넘쳐 우리는 이 광경을 원 없이 눈에 담지만 그 아름다움을 전부 알 수는 없다. 아름다움이란 끝이 없어 항상 무언가는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만다. 하지만 시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아(꽃 얘기를 하는 거다), 좀 잔인하게 말하면 누더기처럼 추해진다. 가여운 그대여(꽃 얘기를 하는 거다), 세월은 이토록 무상하구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여기 정원가만 남았네."

"정말이지, 선인장 꽃을 피워본 적 있는 선인장쟁이의 자랑과 과시는 엄마의 자식 자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친구여, 그대는 저 구름들조차 우리 발밑의 흙만큼 변화무쌍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외할 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흙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미끌거리고, 축축하고, 딱딱하고, 차갑고, 척박한 흙을 그저 추하다고, 썩었다고, 구제불능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이를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라 속단하지 말라. 과연 그 존재가 인간의 영혼에 깃든 냉담함과 잔인함과 사악함만큼 추하랴."

"10월은 봄이 시작되는 첫 달, 땅속 깊은 곳에서 생장하는 달, 남몰래 싹눈이 여무는 달이다. 땅을 살살 파보면 엄지손가락만큼 두툼한 싹눈과 가녀린 새싹, 알알이 여물어가는 구근을 발견하게 된다. ‘봄이 여기 숨어 있네’라는 생각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 정원가여,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라. 나무를 심어라."

"햇볕 한 줌 없는 날씨, 회색빛 짙은 안개, 추적추적 내리는 진눈깨비 따위를 불평하고 있는가? 괘념치 마라. 오직 꽃을 피우는 일에만 신경 써라. 인간들이 궂은 날씨에 대해 투덜거릴 때에도 국화는 오직 꽃 피우는 데만 온 정성을 기울인다."

"신앙조차 계절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여름이면 우리는 범신론자가 된다. 만물을 추앙하며 우리 자신을 자연의 일부라 여긴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 우리는 그저 작은 인간이 된다. 꼭 이마에 성호를 긋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서서히 인간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온다. 집집마다 가정을 지켜주는 신을 위해 따스한 불꽃을 피운다. 집에 대한 사랑은 천상의 신에게 바치는 경배와도 같다."

"사람들은 해마다 자연이 겨울잠에 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잠든 듯한 모습 너머를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땅속 저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다."

"지금(11월) 해내지 못한 일들은 4월에도 일어날 수 없다. 미래란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싹눈 속에 자리하고 있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자라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단지 땅속에 숨어 있기에 새싹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러져버린 과거의 잔여물이 풍기는 쇠락의 냄새는 곧잘 맡는다. 하지만 이처럼 노쇠하고 헐벗은 땅속에서 끝없이 움트는 하얗고 통통한 새싹은 왜 보지 못하는지!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순간이다."

"흔히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고 말한다. 물론 사실이다.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보다 깊은 의미에서 가을은 새 잎이 싹트는 철이라고 할 수 있다. 잎이 지는 것은 겨울이 찾아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봄이 시작되어 새로운 싹이 만들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쌀 한 톨만큼 자그마한 싹눈에서 머지않아 봄이 터져 나올 것이다."

"얼마나 많은 씨앗들이 비밀스럽게 싹을 틔우는지, 얼마나 많은 힘을 끌어 모아 새로운 싹눈을 품는지, 생명을 한껏 꽃피울 순간을 그네들이 얼마나 고대하는지. 우리 내면에 자리한 미래의 비밀스럽고도 분주한 몸짓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멜랑콜리와 불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덧없는지를, 또한 살아있음이, 인간(시간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존재)으로 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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