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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본문

雜食性 人間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하나 뿐인 마음 2018. 12. 4. 11:42


토마시 할리크 지음. 최문희 옮김. 분도출판사.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는 엘에이에서 막 돌아와 대전에서 다시 한국(?) 공동체와의 소임을 시작한 때였다. 미국에서 만난, 외로움과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공동체는 80년대 한국 교회 같은 분위기였다. 그곳에서의 3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간절한 신앙'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의 신앙은 간절했다. 중간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간절하게 성당을 나왔다. 신앙의 색깔은 다양했지만 채도가 높았다고 표현하면 될까. 


그 다음 소임지는 학력수준도 재산 수준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성당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성당에 다닌다'는 말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이 과연 같은 뜻일까에 관한 것. 그전까지의 경험은, 나의 입장에서 최대한 열심히 준비하고 정성껏 마련한 밥상을 준비하여 그들이 올 때마다 따듯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식당에 와 있으면서도 '왜 내가 이 밥을 먹어야 하는가',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겠다.' '내가 먹고 싶을 때만 먹겠다.', '이 밥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등등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야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래,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고, 나라가 바뀌어 느끼는 당혹감인지 단순히 지역 특색인지 그동안 한국교회가 빠르게 변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성당이 커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왔다) 성당에 왔고 나 역시 성당에 살고 매일 미사를 드리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가에 대한 생각을 매일, 자꾸만 하게 되었다. 


돌아와서 내가 만난 교회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매일 뉴스 검색을 하며 그리워했던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이 교회를 등졌고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났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종교적 체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신앙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덕분에 내 신앙의 바닥도 본 셈이다. 나는 믿을 마음이 없는 이들, 혹은 체험이 없어 알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확신(아니 작은 믿음이라도)을 주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을 꺼내 보이지 못했고, 그래서 한동안 신앙 무력감에 빠졌던 것 같다. 기도도 깊이 내려가지 못했고(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더 단순하고 간절한 기도를 했던 것 같다.) 교회 활동들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느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성경이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부터 더 깨닫기 위해, 나를 위해 읽는 것. 삼위일체에 대해 많은 책을 읽고 공부했던 것도, 토마스 머튼의 책을 붙들었고, <만들어진 신>이나 <무신론자들을 위한 종교> 같은 책들을 읽었던 것도 2016년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이 책...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다. 다만 이 책만큼은 줄을 그어가며 몇번이고 다시 정독하고 싶을 뿐이다, 하느님을 기다리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과 무신론의 가장 큰 차이는 인내다. 무신론과 종교 근본주의와 손쉬운 광적 신앙의 공통점은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신비를 너무나 성급하게 함부로 다룬다는 점이다."

"오늘날 온갖 종교 상품들로 북적대는 시장에서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서도 때로 회의론자나 무신론자, 불가지론적 종교 비평가에게 심정적으로 가까움을 느낀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없다는 느낌을 무신론자들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부재감에 대한 그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성급한 조바심의 표출이라고 본다. 나도 간혹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멀리 동떨어져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짓눌릴 때가 있다. 세상과 인생의 수많은 모순이 지닌 양면성은 숨어 계신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 같은 말마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나는 똑같은 이 체험도 달리 해석하고 ‘하느님의 부재’에 달리 접근할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한 서로 깊이 관련된 세 가지 인내가 있다. 이들은 각각 믿음-희망-사랑이라 불린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거나 숨어 계시는 것 같은 순간들, 또한 그러한 긴 시간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도 신앙이 무르익는 데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명명백백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성과 상상력, 감각적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확신들 앞에서는 신앙이 필요치 않다.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차가운 밤, 우리 삶과 세상이 불확실로 가득 찬 어스름한 순간에 신앙이 필요하다. 그럴 때 신앙이 하는 일은 확실성과 평안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믿음과 희망은 바로 그런 순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분의 현존에 대한 확신에만 토대를 둔다면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신앙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확신은 세상의 조화로움을 깨닫고 보편적으로 연결된 인과관계를 이성적으로 따져보는 것으로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

"교회의 옛 스승들에 따르면, 신앙은 하느님께서 어두운 인간 삶의 영역을 몸소 꿰찌르시는 한 줄기 빛이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이 지구와 우리 몸을 따뜻이 비추듯이, 당신 빛줄기의 어루만짐처럼 하느님 몸소 그 안에 계신다. 물론 태양이 그러하듯,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도 일식의 순간들이 있다."

"하느님의 침묵과 세상 안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신앙의 출발점이자 기본 요소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의 부재만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을 절설히 요구하게 하는 것도 없다. 이 체험은 ‘하느님을 원망하고’ 결국에는 신앙을 저버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여러 다른 길이 있으며, 특히 신비주의 전통 안에는 더 풍부하게 들어 있다. ‘하느님 없는 세상’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고는 종교적 추구의 의미,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일’과 그 세 얼굴인 믿음-희망-사랑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

"모름지기 성숙한 신앙이란, ‘신의 죽음’ 또는 그보다 좀 덜 비극적으로는 신의 침묵이라고 일컫는 체험을 자기 안에 녹여 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그런 체험은 내적 성찰을 통해, 피상적이거나 안이한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체험하고 극복해야 한다. 무신론자들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인내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들의 진리는 불완전한 진리라는 말이다."

"나는 ‘하느님과의 만남’,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교회가 그 계시를 전달하는 방식에 신앙으로 동의하는 회심이 여정의 끝이 아님을 깨달았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발자취를 따른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그것은 끝없는 여정의 형태를 취한다. 지상의 참된 종교적 신앙은 결코 이런저런 대상에 대한 추구의 성공, 곧 발견과 소유로 끝날 수 없다. 신앙이 지향하는 것은 물리적 종점이 아니라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무한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틈’이 생기던 순간, 확신들이 흔들리고 무너지던 순간, 점점 더 많은 물음과 의심이 솟던 순간,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신 것이다."

"사제는 능숙한 구호로 남들을 노련하게 조종하는 선동가나 선전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제가 할 일은 정치인들이나 장사꾼들이 새로운 물건에 관심을 주목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동행하고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려 주며 신비의 문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어야 한다. "

"나의 주된 관심은 그들을 ‘회심’시키거나 불확실한 것에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축복하셨다. 참행복 선언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그리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따금 실제로 보여 주는 것처럼- 사후에 받을 보상에 대한 약속을 아편처럼 던져 줌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지금 자리에 가만히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분은 가난을 하느님의 은총을 향한 개방성에 비유하셨다. 자기 안에 닫혀 만족하는 배부른 이들, 확신에 찬 이들, 자신만만한 이들 무리에 끼지 않고 가난한 마음을 간직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모든 이를 배불리시지는 않았고(실제로 그분은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는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했다), 소외된 이들을 강하고 부유하게 만드는 사회혁명을 통해 그들을 중심부에 세우지도 않았다. 그분은 슬퍼하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박해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천국을 주지 않았다. 가까운 미래에 정의로운 사회가 온다거나 위험과 장애물과 십자가가 없는 장밋빛 인생을 펼쳐 주신다는 약속은 더더욱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박해받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선포하셨다. 역설의 대가께서는 그런 이들을 축하해 주셨다."

"가난한 마음을 지녀야 하듯 추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늘 열려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우리 가운데 살아가시는 그분을 사람들이 느끼고 발견하도록 그분을 우리 안에 사시게 하는 것이다.”(토마스 머튼) 그러니 우리는 자캐오의-또한 머튼과 나와 수많은 다른 이의-이름을 부르셨던 분을 어떻게 맞아들이고, 멀리 있는 이들이 어떻게 우리 안에 확실히 자리 잡고 살아가게 할 수 있을지 계속 물음을 던져야 한다."
 
"실패의 순간들에 자신을 동정하고 싶은 유혹, 왜 하느님께서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왜 나처럼 훌륭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시는지 쓸데없이 캐묻고 싶은 유혹, 하느님을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에게 슬쩍 탓을 떠넘기려는 유혹..."
 
"신앙이 우리의 고통과 의심과 대답 없는 문제들의 십자가에서 죽어 갈 때, ‘신앙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소화 데레사의 관심은 단순히 이 비신자들을 교회의 심장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어둠의 체험까지 포함시킴으로써 그 심장을 더 넓히는 것이었다. 비신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그녀는 그때까지 꼭꼭 닫혀 있던 교회를 위한 새로운 영토(거기에 사는 이들까지)를 정복한다."
 "데레사는 무신론이 도전해 올 때 확실성의 요새 안으로 비겁하게 몸을 숨기지 않는 신앙, 안전한 곳에 숨어 참호 너머로 무신론자들을 향해 공격적인 호교론자들의 주장을 발포하지 않는 신앙, 그보다는 언젠가 술탄의 진영으로 들어간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훨씬 더 용감하게 ‘무장해제’ 상태로 ‘비신자들의 진영’으로 들어가, 멀리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무신론자들의 체험이라는 새로운 ‘트로피’를 신앙의 보물 창고로 옮겨 오는 신앙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다. 그럴 때 ‘무신론에 담긴 실존적 진리’, 곧 예전에는 ‘무신론의 바위’였던 그 고통스러운 체험도 신앙의 보물 창고의 일부가 된다. 이 길을 이해하고 깊은 밤 속에서도 참고 기다리며 이를 실천한 신앙은 자기 안에 실존적 체험을 지니게 된다. 그러한 신앙은 인간 조건의 한 부분에 관하여 잘 알고 있고, 사람들의 밤도 견디어 낸다."
 
"신앙은 불신앙을 끌어안음으로써만 불신앙을 극복할 수 있다."
 
"믿음의 유형만큼 무신론의 유형도 수없이 많다. 에사우처럼 죽 한그릇에 신앙 유산을 팔아 버리는 경솔한 무신론이 있다.’하느님을 잊고’ 그 빈자리를 하느님을 대체하는 온갖 우상으로 채우는 무신론도 있다.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인간 자아의 위대함을 하느님이 가려서는 안 되기에 ‘하느님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교만한 무신론도 있다. ‘신이 있다면 내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겠는가?’라는 교만이다. 자신이 투사해 놓은 상상의 신 때문에 오랜 세월 겁에 질려 있다가 마침내 그 신을 없애고 해방되는 무신론도 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무신론도 있다. “믿고 싶기는 한데, 내 고통과 세상의 고통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서 믿을 수가 없군요.”"
 
"신앙과 무신론은 숨어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초월성, 불가해한 하느님의 신비라는 똑같은 실재를 바라보는 두 시각이다. 같은 실재를 정반대 방향에서 바라보았을 뿐, 둘 다 가능한 해석이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리스도교는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 신앙, 낡은 관습과 확신을 떨쳐 버리고 특권주의(particularism)를 거부하며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정통 이론(orthodox)이나 정통 실천(orthopraxis)의 한 측면으로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politeia)로, 말하자면 사람들과 사회들 사이의 새로운 소통 방식으로 제시한다. 바오로가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들’(이방인들)을 찾아 여행을 시작한 것이 교회 역사 전체의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순례자 하느님, 영원한 탈출의 하느님, 설사 우리가 집과 고향에 머물며 높은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고 하느님을 우리 울타리와 우리 관념과 개념과 전통과 신조 안에 가두고 싶어 하더라도 집과 고향을 떠나도록 우리를 이끄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종교적 확신에 가득 찬 이들’에게만 맡겨 두지 말자! 이냐시오 신비주의가 가르치듯, 하느님은 언제나 더 크시다(semper maior). 아무도 그분을 독점할 수 없다. ‘우리의’ 하느님은 구도자들과 그분을 모르는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타자들의 하느님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구도자들의 하느님, 여정 중에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개방성 안에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상대’가 아니라 우리의 기초이시다. 우리 현존의 원천이시며 우리 현존이 성취하는 것의 원천이시다."
 
"교회는 현대인들을 향한 사랑과 존경과 신의의 이 혼인 서약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그리스도의 신부(sponsa)인 교회가 현대인들 안에서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뿐 아니라 의미를 목말라하며 찾고 있는 이들,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씁쓸한 빵을 먹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아뵈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교회의 결함에 있어서 냉담하게 되었다는 말은 대부분 핑계 또는 합리화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환상들은 지키고 싶어 하는 반면,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는 환상을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비록 공동체들이 어떤 잘못들을 안고 있더라도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그 공동체들에서 떨어져 나오면 우리는 허허벌판에 서서 아무 도전 없는 삶을 살아가며, 종교를 사적 환상으로 변질시켜 우리에게 도전이 절실히 필요할 때에도 절대 우리에게 맞서지 않을 몇몇 마음 맞는 사람과만 선택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교회들은 망가지고 죄로 더렵혀졌을지언정, 꼭 피붙이 가족처럼 실제적이다. 날마다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며, 특히 자신을 속이기는 더 어렵고, 우리가 너그럽고 고결하다고 착각할 수도 없다. 공동체 안에서 진리가 드러나고 환상은 깨진다.”(로널드 롤하이저)"
 
"열정적이던 회심자들에게 언젠가 나타나는, 교회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은 신앙의 성숙을 시험하는 매우 유용하고 필수적인 과정이 될 수 있다. 늦어도 청소년기가 되면 내 부모가 완벽하다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 닥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
 
"교회는 가족의 친밀감을 대신할 수 없으며, 마음 맞는 이들의 끈끈한 동아리가 될 수 없고, 거룩한 이들의 엘리트 집단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진보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눈과, 전통의 토양에 굳건히 서 있는 발과,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손과, 하느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고요히 관상하며 경청하는 주의 깊은 귀가 필요하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이 암시하는 것을 우리가 마침내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앙 세계에서 비롯되는 영적,윤리적 자극이 없는 합리주의도 역시 편향적이고 위험할 수 있으며, 냉소적 실용주의나 악의에 찬 회의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면 이 모든 문제가 우리에게 더 분명해지고, 우리가 악과 고통의 문제에 더 잘 직면할 수 있게 되는가? 세상은 정답이 없고 역설로 가득하다. 여러 대안적 설명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우리가 책임 있게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이것을, 나는 저것을 선택했을 뿐인데 당신과 무슨 논의가 필요하겠는가? 나는 도발적인 종교 비평가들을 좋아한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번뜩이고 신앙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을 자극하는, 신앙과 비신앙 사이의 문제들이 얼만 복잡한지를 보여 주면서 신앙이 무기력한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신비의 깊은 골에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 삶에 개입하지는 않는 하느님, ‘사람들과 같이 되시어’ 종의 운명을 짊어지고 ‘고통에 익숙한(이사 53,3-4 참조)’ 분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하느님. 결국 그리스도교가 제시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역경 없는 삶을 선사하거나 역경에 부닥쳤을 때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물음에 즉각 만족스러운 답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며, 어둔 밤이 뒤따르지 않고 낮만 계속되리라고 약속하지도 않는다.그런 깜깜한 밤에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는 약속의 전부다. 우리는 이 약속에 의지하여 우리의 어둠과 무거운 짐을 견딜 뿐 아니라, 타인들, 특히 그분의 약속을 듣지 못했거나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도 견딜 수 있도로고 도울 힘을 얻어야 한다."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본디 대화이며, 그 대화에는 울부짖으며 대들 수 있는 여지도 열려 있다. 우리는 무수한 울부짖음과 기나긴 추구를 통해서만 신비 안에 살아가는 법과 우리의 의심들을 견뎌 내는 법을 배우며, 마침내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과는 상당히 다른 진정한 하느님이 되실 자유를 그분께 내어 드릴 수 있다."
 

"우리 신앙이 비극과 고통의 인간 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체험을 안일한 종교적 위안으로 하찮게 여기지 않으면서 견디지 않으면 우리는 성숙함의 축복을 얻을 수 없다. 성숙한 신앙은 신비의 밤을 참고 기다리며 머무르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이란 언제나 세상의 고통으로 상처 입는 신앙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당신 몸의 흉터로 당신 신원을 확인시키신 것처럼, 우리도 흉터로 성숙한 신앙을 알아본다. 이렇게 이런 대가를 치르고서만 우리는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름, 선택받은 민족을 나타내는 새로운 이름을 얻을 수 있다."
 
"‘알지 못하는’ 하느님이 멀리 계신 하느님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믿을 수 없을 만치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인다.”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분이 너무 멀리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관해 가장 잘 모른다.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거울에 비친 상을 볼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거울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율법의 논리를 초월하기에 ‘명백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하느님 사랑은 ‘어리석으며’,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사랑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법 이성은 이를 ‘어리석다’고 여긴다."

"하느님처럼 되는 데는 전혀 다른 두 가지 길이있다. 그분 신비의 너울을 벗기고 스스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을 어느 정도 얻는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알게 되는 길’이 있고, 역설로 가득한 어리석은 사랑의 논리를 행동으로 본받음으로써 ‘하느님처럼 되는 길’이 있다. 첫 번째 길은 사탄이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제시했던 길이고, 두 번째 길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길이다. 바오로는 두 번째 길, 십자가 위에서 끝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어리석은’ 그 길을 잘 알고 있고, 그 길을 더 급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그런 일이 한때 일어났었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무언가를 뜻한다. 부활에 대한 우리 믿음은 우리가 그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부활함으로써 확인된다. 부활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우리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었으며,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받는 그 은총의 선물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이란, 우리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힘으로서 그 사건을 우리 삶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거나, 복음을 아직 들어 본 적 없거나, 아무리 좋은 양심으로도 도무지 자신의 이해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로 그 메시지가 도착한 까닭에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도 자신의 양심과 이해에 따라 살았다면 구원될 수 있다. 인성을 ‘선물이자 임무’로 받아들이고 그 임무를 양심적으로 충실하게 완수하려고 노력하는 한, 그들은 자신의 인성에 힘입어 ‘성탄의 신비’인 육화 사건에 동참한다. 십자가로 이어지는 희생의 사랑을 삶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려 애쓰며, 그 사랑이 삶의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장애물들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한, 그들은 분명 부활의 신비에도 동참한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약함 안에서 드러나는 힘”, 그리스도의 희생의 힘, 살아 있는 실재인 그분의 희생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종착점인 양, 그리스도의 삶과 희생이 더 이상 아무 영감도 줄 수 없는 절망적 낭패이고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패배인 양 살아간다는 뜻이다."

"인간의 그 어떤 체험과 이성과 감각도 부활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돌을 자기 힘으로 치워 버릴 수 있다. 희망과 사랑으로 지탱되는 믿음만이 부활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그 사건은 감추어져 있고 보이지 않는다. ‘부활 찬송’에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그 밤만 알고 있었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끝장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그 사건은 역사의 한가운데 현존해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지금 바로 이 순간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지고 춥고 어두운 무덤 위로 부활절 아침의 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의 필수적인 과제는 아주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우리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그 일에 영향을 끼친 바는 없는지 우리 양심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저질러진 악에 우리 책임이 없더라도, 그것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택받음의 의미는 우리가 타인의 운명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타인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의무들로 표현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억에는 희생자들도 남아 있다. 국가들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치른 희생과 자기들 안의 희생자를 기린다. 그리스도인들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그들이 희생시킨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조제프 무앙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과 소중한 가치는 타인과 함께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특징과 가치는 새로운 친밀함의 문화, 우리와 다른 이들, 타인들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새로운 방식에 있다. "
 
"샬롬은 회복된 평화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화해, 사람과 인류 가족의 상호 화해, 인간 마음의 깊은 평화를 뜻한다. 샬롬은 치유와 용서와 구원에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신앙은 거짓말과 핑계와 망각의 굴레에서 우리 양심을 해방시켜 우리를 치유하고 되살려 온전한 진리로 이끈다. 성경에서 진리는 지적 인식보다는 올곧은 삶의 문제다. 신약성경은 단순히 진리를 깨닫거나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진실함과 성숙한 신앙의 또 다른 지표는 신앙이 얼마나 양심을 위한 공간을 열어 주는가, 얼마나 양심을 비추고 일깨우고 북돋우는가에 있다. 성숙한 신앙은 양심이 무르익도록 돕지만, 미성숙한 신앙은 양심을 불신하고 양심 대신 밖에서 강요된 명령들과 금령들을 기계적으로 따르려 한다."
 

"주변 국가들이 역사의 공포를 다양하게 설명하는 위로의 신화들을 갖고 있는 반면 성경 속 이스라엘은 ‘아우성치는 풍경’으로 남아 있다. 시편과 예언서들은 이미 일어난 일을 전혀 누그러뜨려 합리화하지 않고, 고통받는 민중의 외침을 ‘앞으로 오실 분’에게 보낸다. 인간의 힘이나 정의로 치료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최후의 심판이 올 때까지 하느님을 향해 열어 두어야 한다."
 
"쉽게 치유하고 속죄할 수 없는 과거의 과오들, 지난날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있다(전체주의 정권의 범죄들도 분명 여기 속한다). ‘잊기’ 어려운, 어떤 의미에서 잊혀서도 안 되는 이 잘못들은 법률과 재판과 처벌의 통상적인 장치로도 지울 수 없다.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잘못들이 있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법률이라는 인간적 도구와 공적 논의라는 사회적 치료법을 다 써 보아도 모두 소용없다면 용서라는 중요한 영적 활동이 적절하다. 용서는 결코 경솔하게 잊는 것이 아니라, 모든 판단을 접고 ‘이 세상’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정의와 자비의 좌(座)의 권한에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내 죄가 보일 때에는 그 모습에 홀리거나 낙담하지 말고, 그 죄를 보고 인정할 수 있게 해 주는 빛의 근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내내 뒤만 돌아본다면 세상의 소금은 되지 못하고 결국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될 것이다. 자신의 잘못들을 바라보고, 그때 하느님께 바칠 것이라고는 무너진 마음 밖에 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드 멜로에 따르면, 우리 교리서들은 후회를 회개와 회심 과정의 필요 요소로 강요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의 힘에 대한 신뢰와 우리 원수들을 기꺼이 용서하려는 마음을 강조해야 한다. 세상과 나에게 큰일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비극적인 유일한 죄,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고 드 멜로는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고지식하지 않다. 그분은 너그러운 사랑이 언제나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확신으로 우리를 끌고 가지 않으신다. 그러한 행동은 희생과 패배에 대비해야 한다. 최소한 우리는 그분처럼 순진해 빠진 바보들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기적인 계산에서 벗어나 굳센 도덕적 힘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용기만이 세상을 사탄이 주도하는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저 아래”에 있는 악마들은 사람들이 진정한 슬픔이나 참된 행복 대신 그들의 영혼에 실의와 염세와 자기 연민을 키울 때 기뻐한다. "

"‘멀리 있는’ 이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사실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어떻게, 언제 말해야 할까? 아니 말을 하기는 해야 할까?"

"너무 많은 개념과 생각을 짊어진 믿음, 너무나 인간적인 믿음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믿음은 너무 크지 - 또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럽지 - 않은가? 우리 믿음은 하느님의 믿음이 될 때라야 참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 될 것이다. 하느님에 관한 것은 이 세상의 눈에는 언제나 작고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눈에 위대하고 강하고 굳건한 것을 부끄럽게 만드시지 않았던가?(1코린 1,25-28 참조)"

"신앙의 진정성은 믿음의 ‘주제’에 관하여 무엇을 어떻게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지각적 ‘내용’보다는 인내를 통해 더 잘 드러난다. “인내는 모든 것을 이루리라.” 이것이 또 한 명의 위대하고 지혜로운 교회 박사인 아빌라의 성 데레사의 믿음이고 가르침이었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신앙은 결심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앞으로 닥칠 일들 안에서 항구하게 참고 기다리는 인내를 요구한다."

"결국, 우리가 삶의 끊임없는 수수께끼들에 부닥칠 때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들로 돌아서서 그런 대답들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며 발휘하는 인내는 ‘바로 손 닿을 곳에’ 계시지 않는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숨어 계신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 열려 있는 개방성,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고요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담대히 ‘예’ 또는 간절히 ‘아마도’라고 대답하는 것, 가장 길고 어둡고 추운 밤들에도 체념의 재를 거듭 헤치고 튀어 오르는 그 작고 집요한 불꽃이 바로 신앙이 아닐까?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과 희망을 갈아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인내는 이 둘의 공통분모이자 공통 열매다."

"신비롭고 역설적인 신앙 세계가 형성되는 방식도 그러해서, 밖에서 볼 때는 가장자리처럼 보이던 것이 일단 안에 들어가 보면 놀랍게도 중심부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 한복판에 어둡고 텅 빈 ‘지성소’가 있는 것처럼 신앙의 성전도 그 가장 거룩한 자리에 어둡고 텅 빈 공간을 숨기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게 머무르시는 곳이 바로 거기, 어둡고 텅 빈 그 공간 안이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일’은 ‘신앙의 대기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한복판에서도 일어난다."

"“자네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확신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야.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자네가 하느님을 믿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아니라네.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자네를 믿으신다는 사실이지. 그리고 지금으로선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걸세.”"

"믿음은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의탁이다. 믿음의 문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또는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우리의 확신은 어떤 형태인지를 너무 심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하느님을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종교적 추구에서도 자기 나름의 추구에 지나치게 빠지다 보면 치명적으로 길을 잃어버리게 되고,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칠 수 있다."

"신앙의 핵심에 이르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으시기에 가능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믿음, 말하자면 열정적이면서도 참고 기다리는 믿음으로 우리를 믿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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