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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루카 13,22-30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dailyreading 본문

루카의 우물/루카 13장

루카 13,22-30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dailyreading

하나 뿐인 마음 2022. 8. 21. 11:04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23절)
말 한마디로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이 질문으로 이 사람이 자신의 무게로 구원받으려 하기보다 구원될 사람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신의 구원 가능 여부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문이 좁으면 못 들어가고, 문이 넓으면 수월하게 들어가고…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구원이 요원하다 생각했을 수도 있고, 소위 믿는다는 이들의 행실을 보니 저들마저도 안되겠다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대답이다. 기다 아니다로 답하시지 않는 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오늘따라 '들어가도록'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자꾸 머문다. 살다보면 '좁다'에 갇혀 '들어가는 일' 자체를 망설일 때가 있다. 들어가려고 시도를 하지 않으면 들어갈 기회는 영영 없다. 초대는 받았는데, 막상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지 않았으니 주인이 알 리가 없다. 닫힌 문 뒤에서 모른다고 말하는 집주인에게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 '주님께서 우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고 말해봐도 서로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증명하진 못한다. 잔칫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처럼 그저 손님으로 왔다가 서로 일면식도 없이 음식만 먹고 다시 제 볼일을 위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면 그건 모르는 사이이다. 내가 사는 길거리에서 그분이 아무리 가르쳐본들 내가 흘려 들었거나 그 가르침이 내 마음을, 내 생각을 움직이지 못했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보다 나을 게 없을지도 모른다. 물리적으로는 한 공간이었으나 심리적,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했다고 하겠다.

지근거리라 해도 문을 통과해 주님 곁으로 다가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 늘 문밖에 머물렀다면 주님과 나의 사이는 과연 아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따라 '들어가도록'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자꾸 머물었던 이유가, 늘 성당에 머물면서도 정작 마음은 다른 곳을 찾아 헤매었던 건 아니었나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담벼락 바로 옆을 걸으면서도 정작 힘들여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면, 근처를 맴돌며 먹고 마셨지만 주고 받는 마음 없이 무관하게 나만의 삶을 살았다면, 가르침을 들었고 모르지도 않았지만 상관 없는 사람처럼 가르침이 나를 이끄는 것을 거부하고 내 뜻대로 살았다면 스스로 택한 바깥은 결국 하느님 나라의 바깥(28절)이 될 수도 있겠지.

요 근래 답답한 일이 많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먼저 거리부터 두려는 나의 오랜 습성이 또 나온다. 그만 보자, 그만 듣자, 잠시 멈추자. 그러나, 그 상태로 끝내진 말자. 눈 감고 귀 닫고 조금만 견딘 후 힘을 길어올려 다시 걸어들어가자. 나를 보내신 분이 이 공동체 안으로 자꾸 나를 들이미신다. 그러니 이제... 들어가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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