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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27,32-44 믿음의 댓가, 신앙의 끝은 무엇인가. 본문
예수님의 십자가가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넘겨졌다.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넘어간 것이다. 예수님과 시몬 모두 죄도, 명분도 없이 십자가를 졌다. 살다보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십자가가 내 삶에 나타날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죄가 있어 이 십자가가 내게 왔는가 싶을 때. 하지만 애당초 십자가는 예수님께도 시몬에게도 마땅하지 않았다. 이 십자가는 원래 예수님이 져야 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인간이 져야 하는 십자가였다. 잘못된 방법으로 축적해온 자신들의 힘과 권력, 재물을 내려놓을 수 없어서 예수님께 없는 죄를 만들어 누명을 씌우고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에게나 마땅한 십자가였다.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느닷없이 십자가를 지는 것. 억울했을까. 예수님 주변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고통을 나눠 받고 동참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수님께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우리가 겪는 아픔도 깊고 무거워진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혼자서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넘겨지는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를 나누어 질 때 구원의 신비도 함께 넘겨받는다. 사도 바오로를 보라.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이 세상에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넘겨 받은 사람이 많고, 적극적으로 그 십자가와 고통을 나눠 받길 청했던 성인들도 있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두렵고 그 고통의 신비를 이해하기엔 부족하지만, 설명조차 어려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택한 자리가 예수님의 수난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고통의 길 끝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처럼(21,38) 예루살렘 밖으로 끌려나와 죽임을 당하셨다. 일반적으로 사형수에게는 향 알갱이를 포도주에 섞어서 주곤 했다. 마취 효과도 있고 의식을 잃게 하여 의식이 온전한 상태에서 못박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 예수님께는 쓸개즙을 섞어 오히려 고약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거부하심으로써 의식이 있는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셨다. 이는 제자들과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도 맺을 것을 마시지 않겠다(26,29)고 하신 말씀의 이행이기도 했다.
머리 위에 붙여진 죄명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예수님의 첫번째 공적 호칭이 왕(임금)이었고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2,2)) 마지막 호칭 역시 로마 군인들에 의한 왕이었다. 왜 하필 ‘왕’이라는 표현인가. 왕은 임금과 동의어로 군주 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칭하고, 황제는 왕이나 제후를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이다. 곧 왕(임금)은 하나의 임금이고, 황제는 왕들 중의 임금이라 아래에 다른 왕들이 있다. 예수님은 여러 왕들 중에 높은 왕이 아니라 다른 왕이 없는 세상의 유일한 왕이시다. 이 왕은 비극적인 모습이지만 땅 위에서 높이 들려 현양되어 계신 상태이다. 왕답지 않은 왕, 우리의 앎을 뛰어넘은 모습의 왕.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들 가운데에서 높이 들리신 예수를 사람들은 조롱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의 무능력을 언급한다.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세상 사람들 눈에는 능력이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음은 생각지도 못한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원로들(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인격과 신앙을 더 갈고 닦았어야 하는 사람들이건만...)은 ‘구원’와 ‘믿음’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조롱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들은 예수님이 다른 이들을 구원하셨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알면서도 조롱하는 것이다. 이들은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 조롱했다.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내 보시라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예수와 예수를 구원하지 못하는 하느님까지 조롱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끝까지 믿었음도 알고 있었다.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믿음을 조롱하고 구원을 조롱했다. 이들의 끝은 어디인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못박았지만, 지금 가장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건 바로 이들이었다. 신성모독은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남들은 구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그 누구도 참아내지 못한다. 우리들은 언제부터 제 앞가림보다 타인을 먼저 챙기는 사람을 이다지도 견디지 못했는가. 믿음의 댓가, 신앙의 끝은 무엇인가. 죽지 않는 것? 억울할 일이 없는 것? 고통받지 않는 것? 배신 당하지 않는 것? 부끄러울 일이 없는 것? 아니면, 죄짓고도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 예수님의 수난을 따라가고 있는 이 피정이 점덤 깊어지고 있는데 나는 도리어 까탈스러워지고 있다. 평화롭게 성당에 앉아서, 아름다운 정원을 걸으며 묵주 산책을 하면서, 편하게 앉아 강의를 듣고 미사를 드리고 진지한 강론을 들으면서, 고요하고 정갈한 방에 머무르면서, 제때에 나오는 밥을 먹으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피정이 깊어간다. 나 자신이 미워지는 유혹도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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