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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나쁜 페미니스트 본문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사이행성.
요즘 페미니스트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는 법'을 배워간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타인을 보면서, 나 자신을 보면서 느꼈던 불편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 깊은 좌절과 책임감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함께 살아가는 법'에 관한 배움이다 싶다.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 한계를 넓히며 내가 만나는 이들을 좀 더 바른 태도로 대하고, 아이들이나 청년들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조언이나 응원을 해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나의 부족함만 깨닫고 배워간다.
젠더 평등에 대해서는 나만의 의견이 많기에 때로 어떤 이상에 맞춰 사는 데 부담을 느낀다. 모든 것을 다 갖고 모든 것을 잘하는 좋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저 나를 받아들이고 내 신용 평점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30대 여성일 뿐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런 여자가 아니라고, 약점이 많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이런 여자가 절대 되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초과로 일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지치는 일이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으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쉬웠다.
내가 알 수 없는, 혹은 관심조차 없는 이야기도 많고 아무래도 내 삶과는 동떨어진 사회의 이야기도 많아서 중간중간 지루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지만 마지막 자신의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하는 '나쁜 페미니스트' 부분이 있어 나는 이 책이 좋아졌다.
또 하나 생각해봤던 점은,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저자가 보고 읽었던 영화나 책을 '흑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을 백인 주인공에 대입시키며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당연히 세상도 그렇고 보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감했노라, 연대했노라, 기도했노라 스스로 만족하며 살았던 지난 시간이 부끄럽다. 타인을 위한 기도도 '나는 절대 이분들의 심정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아무도 깨닫지 못할 때, 깨달았다 해도 두려움과 안주하고픈 마음에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을 때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던 '한 사람'. 나는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지난 삶에서 난 언제 그 '한 사람'이 되었었나.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으로는 평생 그 '한 사람'이 될 수 없겠지. 부끄러움과 후회를 안고 그 '한 사람'을 응원하고 그 '한 사람'에게서 배우며 그 '한 사람'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반대의견 제시는 분노 표출이 아니다. 아직도 이 사회에 여성 혐오가 만연하고 여성이 피해를 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행위는 분노가 아니다. 이 관점을 분노라 일축해 버리는 건 여성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고 다시 여성을 불평등한 장소로 밀어 넣는 것이다.
큰 정의가 있고 작은 정의가 있지만 작은 정의들을 위해서라도 싸울 수 있다면 싸워야 한다. 더 큰 선, 더 큰 사회적 정의를 위해 과연 나는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지를 묻지 않을 때도 많다.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공공연하게건 은연중이건 사람들은 누군가의 허락을 받으면 정도를 넘는 행동까지 하게 된다.
우리는 억압이나 처벌의 공포 없이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표현할 자유는 없다.
그의 어정쩡한 사과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넘어가려는 태도이다.
'이 세상의 끔찍한 것들'에 대해 말하면서 유머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그들에게 상식이란 게 있어서, 양심이란 게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가끔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말하기 꺼려하는 것들을 말해버리는 사람들은 그냥 개자식들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얼마든지 개자식들이 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그렇게 할 자유는 없다.
우리는 살면서 크건 작건 수많은 부당함을 목격하면서 생각한다. 끔찍해. 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싸움을 해줄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는 침묵을 지킨다. 침묵이 더 쉽기 때문이다.
Qui tacet consentire videtur. 침묵은 동의를 의미한다. 우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나를 향한 이런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 된다.
내가 진짜 놀란 건, 정말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다니엘 토쉬)의 쇼를 보고 있던가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딱 한 명만 일어나서 확신을 갖고 "이제 그만해요."라고 말했다는 것 말이다.
우리는 우리 중에서 가장 부족한 사람들, 못난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하고, 제도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성공한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존경하고 모방하는 데만 시간을 바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의로운 척이 정의를 방해한다. 정의로운 척은 다른 상황에서 조심스럽고 사려깊게 공유되었더라면 유효했을 의견을 방해한다. 현대 문명의 도구들은 우리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지만 비극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숨을 들이쉬고 느끼고 생각할 시간과 공간과 거리라는 특권을 빼앗아 버리기도 했다.
내가 말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나와는 다른 특권을 지녔지만 말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것일까? 특권은 그 사람의 말에 들어 있는 유익한 내용까지도 무효화시켜 버리는 것일까?
비난이나 매도보다는 관찰과 인정이란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특권들을 토론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 특권을 가졌다는 비난과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논쟁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많이 가졌고 누가 못 가졌는지 따지는 비교 올림픽을 열지 말아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쏟아지는 항의와 불평에 흔들리지 않고 이 세상에 여러 개의 진실이 공존할 수 없다는 인상을 풍기지 않고 내가 아는 진실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젠더를 잘못 수행하면 직간접적으로 그에 따른 대가를 받게 되고 사회가 입력한 대로 젠더를 잘 수행했을 때는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마치 젠더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디스 버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