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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본문

雜食性 人間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하나 뿐인 마음 2016. 3. 11. 23:19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무엇이 나를 돕는 걸까? 그건 바로 우리가 함께 사는 데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행복도 있고 눈물도 있다. 우리는 고통스러워할 줄도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줄도 안다. 고통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아픔,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이다. 우리 여자들이 바로 이 아픔과 고통의 길을 향해 용감하고 당당하게 나아갔음을 나는 밝혀야만 한다......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 고통은 지난한 삶의 증거이다. 다른 증거 따윈 없다. 다른 증거 같은 건,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했던가.


남녀 평등이라는 말. 페미니스트를 진지하게 논하고 행해야 하는 시대. 모든 것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공평이 아니듯, 남녀의 역할이 차등 없이 골고루 주어지는 것 역시 페미니즘이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전쟁터의 여성. 총을 쏘고 부상병을 치료하고 운전을 하고... 하지만 "여자는 전쟁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여자들을 싸우게 했다는 죄책감'에 대해 말하는 공병대대 남자 지휘관은 또 다른 의미다.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앎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 놓은 비축물이나 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고통은 그리 쉽게 우리를 긍정적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래서 고통이겠지만, 그저 아픔을 겪고 지난한 세월을 통과한 것만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하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가족이나 지인, 이웃들(특히 남자들) 중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동석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덜 진실해지고 덜 솔직해진다. 이미 대중을 의식한 대화가 돼버린다. 관객을 위한 대화. 당사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얻어낼 길은 요원해진다. 강력한 자기방어에 부딪친다. 자기통제, 끊임없이 이야기가 다듬어진다. 일종의 패턴까지 생겨난다.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공훈들만 가득한 황야에. 도도하고, 결코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곳에...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 불신에,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 바꿔치기하려는 이 욕망에 나는 매번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맞바꾸려는 욕망에.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했지...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누구도 우리 위에 있지 않았고 누구도 우리 아래 있지 않았어.


다들 나를 좋아했지. 왜냐하면 나는 늘 사랑과 기쁨에 넘쳤거든. 인생은 사랑과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하느님은 총을 쏘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게 아니야. 서로 사랑하라고 만드셨지. 어떻게 생각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거시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전쟁은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 속에 새겨넣었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넣었다.


승리만 하면...이날들만 견뎌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그렇게 끔찍하고 처참한 전투가 또 있을까.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 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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