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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프락티코스 본문

雜食性 人間

프락티코스

하나 뿐인 마음 2016. 4. 5. 11:01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지음. 허성석 역주, 해제. 분도출판사


'어떻게 내적 생활 혹은 영적 생활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자신의 전 삶을 지배한 화두로 삶고 살아간 에바그리우스의 수행생활에 관한 가르침.


대부분 문맹인 수도승들 가운데서 에바그리우스는 지식인처럼 보였지만 정작 자신은 지식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스스로 작은 이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적대감을 침묵으로 인내했다.


수도승생활은 욕정부와 관련된 '악'과 이성부와 관련된 '무지'를 제거하여 영혼 안에 '덕'을 쌓고 '인식'을 얻기 위한 전적인 투쟁.


아파테이아는 감정이 없는 상태나 감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욕정을 극복한 상태, 더는 욕정으로 동요되지 않는 초연한 상태를 말한다.


에바그리우스가 '프락티코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수도승이며, 더 정확히는 독수도승을 뜻한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이며, 인간적인 일에 종사하기를 포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활동적인 역할을 받아들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관상에 전념하고 헤시키아hesychia(관상에 필요한 영혼의 상태로서의 고요와 평정. 세상으로부터의 이탈과 고독의 조건으로서의 고요. 참된 기도와 진정한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독과 침묵에 대한 사랑이라 하겠다.)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프락티케는 '덕의 실천'으로 주로 '로기스모이logismoi'곧 '악한 생각들'과의 싸움이다. 그 중 여덟가지 주요한 악한 생각은 '탐식,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이다'. 프락티케는 주로 생각에 맞선 싸움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생각'은 단지 수도승과 맞서 싸우기 위해 악령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며 실제의 적은 악령이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욕정과 생각과 악령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즉, 악령은 생각을 불어넣고, 생각이 오래 머물 때 우리 안에 욕정을 불러 일으키는 이런 구조에 대항하려면 생각이 우리 안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수도승은 생각에 대한 각성과, 유혹을 즉각적으로 물리치려는 열성을 통해, 자신을 거스른 악령의 행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어떠한 욕정도 더는 작용하지 못하는 영혼의 상태인 아파테이아에 도달하게 된다. 


"그대를 슬프게 한 사람과 마음으로 다투면서 자신을 분노에 넘기지 마라. 또 계속 쾌락을 꿈꾸면서 음욕에 넘기지도 마라.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혼을 어둡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욕정에 불타도록 영혼을 초대한다.


유혹의 순간에 그럴듯한 변명으로 독방을 떠나서는 안 된다.


수도승은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지만, 마치 오랜 세월 육체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육체를 사용해야 한다. 


악령은 세속인과는 주로 사물을 통해 싸우지만 수도승과는 생각을 통해 싸우는 경우가 더 잦다.


우리는 일하고 밤샘 기도를 하고 줄곧 단식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대신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라는 법이 있다.


자신의 육체를 너무 잘 양육하는 우를 범하는 사람과 육체를 돌보면서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는 사람은 육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책망해야 한다.


수도승의 죄는 생각이 제시하는 금지된 쾌락에 동의하는 것이다.  


수도명을 청할 때 첫번째는 'Agnus'였고, 두번째가 'Evagria'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첫번째 수도명은 주어지지 않았고 두번째 수도명이 무난히 허락되었다. 동기 몇몇이 여전히 이름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을 때 무난히 통과했던 나는 그때부터 고충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괜찮다'고 한 나의 수도명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거였다. 이해 욕구도가 높고 감정선이 섬세한, 3유형으로 기울어진 4유형의 나로서는 에바그리우스가 그때까지는 매력적인 성인이었지만, 그의 인생 후반부는 나를 조금씩 흔들기 시작했다. 탁월한 성경지식과 지혜, 하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로기스모이들. 그리고 그 로기스모이에 동의함으로써 당하게 되는 온갖 어려움. 대중적으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교부라는 점 역시 그의 진면목과 더불어 그의 실수도 덜 드러나게 했음이 더 크게 다가오면서 나는 다시 고민을 시작했고 뜻하지 않게 이냐시오의 한 마디로 지금의 수도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일부러 한국에 돌아온 기념으로 사순시기 봉재책으로 이 책을 택했고, 최고로 바빴던 사순시기를 보낸 탓에 이 얇은 책을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한 채 겨우 마쳤다. 하지만 미처 줄긋지 못하고 지나간 많은 구절들이 리뷰를 남기려고 잠시 들춘 지금에서야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내가 부끄러워 뭐라고 리뷰를 남기지도 못하겠다. 비록 내 수도생활의 공식적 주보성인이 되진 못했지만, 결국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 삶으로 돌아왔던 에바그리우스 성인께 전구를 청하며 힘을 얻어야겠다. 


참, 나는 이 분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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