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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르 7,31-37(훈화) 본문

마르코의 우물/마르코 7장

마르 7,31-37(훈화)

하나 뿐인 마음 2015. 9. 5. 06:30

 

"에파타!"

 

'들어라', 특히 '말해라'하지 않으시고 "열려라" 하셨음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그러고보니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정도 하시고 치유 받은 이는 아예 말이 없고 사람들만 웅성웅성 말을 합니다, 게다가 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이가 듣게 되고 말하게 되었으니 누구보다 말하고 싶었을텐데 정작 그는 별 말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듣고 언제든지 말할 수 있게 치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듣고 언제 말해야 하는지 '제대로'(7,35) 알게 되었나 봅니다. 하고 싶을 때가 아니라 해야할 때에 말입니다.

 

치유받은 이에 대해서 묵상하고 나니, 말씀 한 마디보다 행동이 훨씬 더 많으신 예수님(데리고 나가시고,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침을 바르시고, 혀에 손을 대시고, 한숨을 쉬시고, 말씀하시고...)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역시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이시는 데서 드러나기보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시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이치겠지요.

 

치유받은 이와 구경에 그쳤던 '군중'의 차이도 이렇게 드러납니다. 말을 할 줄 알아도 침묵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과 하지 말라는 말도 자기 판단만으로 괜찮다 여겨지면 너무나 쉽게 말해버리는 사람의 차이. 치유 받은 저는 '제대로' 듣고 말하기 위해 당신의 뜻을 먼저 구하고, 치유가 필요한 저는 성급히 제 속된 판단에만 의지합니다. 당신께, 이웃에게, 그리고 저 자신에게 '열려 있는' 자세를 가진다는 건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언제이든 기다려야할 때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고 위험의 때에라도 말해야 할 때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걸 뜻하겠지요. 

 

"Be opened!" 당신은 'Open!'이라고 말씀하시 않으셨음을 기억합니다. 내가 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여실 때 열려야 하는 거지요. 치유 받은 이는 제 마음껏 여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여실 때 기꺼이 '열리는' 사람이 되었음이 그의 침묵으로 드러납니다. 이제 그는 말해야 할 때 용기 있게 증언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조그만 억울함에도 쉬이 견디지 못하고 말하고 싶어했던 얼마 전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 당신의 뜻보다 저의 감정에만 집중했었던 저 말입니다. 그 날의 제 침묵은 열림도 기다림도 아닌 소리 없는 분노일 뿐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주님.

 

이 사진은 몇 달 전 피정을 하며 매일 걸었던 먼델라인 신학교 산책길입니다. 사람도 별로 없고 길도, 경치도, 공기도 좋아서 차를 타고 쌩쌩 달리면 무척이나 상쾌하겠다 싶은 이 길의 속도는 시속 25마일이었습니다. 피정 동안 이 표지판을 보며, 달릴 줄 안다고 해서 달리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내맘대로 속도를 높여 달려도 되는 것은 아님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속도로 이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이 길에 필요한 속도로 내가 달려야 한다는 것, 25마일이라는 속도 안에는 신학교 주위를 감싸는 침묵에 동참하고, 마음껏 뛰노는 동물들을 염려하고, 과속으로 인한 불필요한 매연을 줄이고, 푸르름과 고요함과 맑은 공기를 느끼라는 배려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생각했지요.

 

우리를 치유하시는 주님,

저희가 당신의 뜻에 늘 열려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저희가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일에 늘 열려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저희가 이웃의 행복과 아픔에 늘 열려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저희가 제 자신의 솔직한 목소리에 늘 열려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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