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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그의 기쁨과 슬픔 본문

雜食性 人間

그의 기쁨과 슬픔

하나 뿐인 마음 2014. 10. 16. 06:44


정혜윤 지음. 후마니타스.


이 책은 '산 자'(해고되지 않은 자)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패배한 자들끼리 모여서 해고되지 않은 사람들과 맞서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된 것들을 바루기 위해 바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자'였지만, 짐을 꾸려 파업에 동참함으로써 진짜 '산 자'임을 증명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숨죽인 삶. 옳은 이들의 고되고 가냘픈 숨.


미래가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단순하기를 바란다. 확실성 속에 있거나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해 여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삶의 불확실성 앞에 거의 벌거벗은 채로 서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긴 이야기들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실은 좀 더 괜찮은 세상이라는 것,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왜 이들의 노력으로 증명되어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 잘못한 이들이 아니라 피해를 본 억울한 이들이 세상을 바루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책임을 져버리고, 무죄한 이들이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가 라는 생각.


다른 세상을 봤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본 다른 세상이란 것은 우리에게 잘못딘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기업가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고 노동자라고 선언한 순간, 어쨌든 이제부터는 잘 배워서 사람들과 뭔가를 좀 만들어 가고 싶어졌습니다.


성경의 창세기는 유배 시대에 쓰여졌다. 참담한 유배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고통 속에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다가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어쩌다가 망하게 되었는가.' '신은 우리를 왜 버렸는가.' 삶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 자신들의 처지를 가늠하게 되며 '기원'(=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촌철살인들로 이루어진 철학서적 같은 창세기를 떠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그들이 삶을 깨달아가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 속에서 처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배생활과 비통한 심정을 발견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인생인데도 오갈 데 없는 나그네처럼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


안타깝게도 우리는 살면서 배신하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어떤 타협인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타협하면서 사는 우리는 어떤 선택이 배신인지 아닌지, 어떤 선택을 배신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가 결코 쉽지 않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 그는 정비 과정에서 배운 대로 했다. '돌아보면 어깨 너머에 누군가 있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려면 누군가 도와야 한다.'


굴뚝에 있을 때 큰 딸아이가 생일을 맞았다. 그는 큰 선물, 아주아주 큰 선물을 주고 싶었다. 아무리 대통령 품질상을 받아 봤자, 7년 동안 단 이틀 월차를 내고 일해 봤자 하루 아침에 해고되는 '비정규직 굴레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는 것이 그가 생각한 선물이었다. 


내 진짜 꿈은 5년을 그대로 되돌려서 5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5년이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고 싶어요. 스물네 명 죽은 사람 없이, 아무도 죽은 사람 없이, 아무도 우는 사람 없이, 라인에서 일하다 소주 한잔하고 퇴근하고... 그렇지만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해고 무효 소성 재판이 진행되는데 이겨야 하고 회계 조작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그게 꿈이예요.


양심과 염치와 도덕 등이 바탕이 돼서 행동하는 사람은 최소한 사람 노릇은 하기 위해서 자기 희생도 감수할 줄 알고 계산에 따르지 않더라구요. 그리고 그런 동지가 노동자답게 싸울 수 있는 힘들을 갖고 있어요.


우리 희망은 소박합니다. 일상을 찾는 겁니다. 길바닥에서 농성하는 것이 아니라 청춘을 다 바친 공장에서 다시 공구 들고 땀 흘리며 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퇴근길이 있고, 동료가 있고, 이웃을 맘 편히 확인하고, 자식의 아빠이자 노모의 아들로 최소한의 역할을 하면서 그동안 못했던 시간들을 보충해 가는지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제 희망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의미를 잃을수록,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모를수록, 자신의 삶도 의미를 찾기 힘들다.


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려고 안달을 할까? 자신을 안다는 것,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아마도 우리가 비난받을 때, 오해받을 때, 외롭게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그리고 버텨야 할 때, 그것도 확신 없이 버텨야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진짜 치유는 돌아가는 거예요. 전문가들이 우리를 치유해 주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 나에게는 일하러 복귀하는 것이 치유예요. 이 불안함은 돌아가서 일을 해야지만 사라져요.


이들이 전해주는 이 담담한 삶의 진실은 현실에서 나를 힘들게 만드는 크고 작은 일들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게 한다. 멀리 캄보디아에서 척박한 환경을 맨손으로 일궈가며 살아가는 친구 수녀의 이야기나 새 사제의 희망찬 조건들을 포기한 채 볼리비아 그 가난한 나라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어느 젊은 신부님의 이야기처럼, 얼토당토 않은 불평들 속에서 나 스스로 내 삶을 좁고 캄캄하게 만들고 있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말이다.


나 개인으로 보자면, 저는 사실 해고자 명단에 없던 사람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상황은 참 고독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어려운데, 이런 불확실성에 맞붙어 싸우면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회사의 압력, 외부 여론, 시선들을 뒤로하고 과연 옥쇄 파업을 해야 하는가? 무엇이 최선인가?' 스스로 자문자답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이 길밖에 없느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느냐?' 수없이 물어봤습니다.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전에 노동자들은 설움을 표출도 못하고 당했는데 우리는 다부지게 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고 싶었고 인간으로 싸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간단한 질문 몇 가지에 자신의 말로 자신의 생각을, 삶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야기 하나하나가 부드럽게 나를 질책하기도 하고, 부끄러워 숨고 싶은 나를 억지로 바람 부는 밝은 곳에 세워 둔다. 얼마간 사람처럼 헛된 게 없다는 생각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를 채웠지만, 또 다시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야 함을 넌지시 일러주며 금방이라도 기름 냄새 풍기며 힘내라 툭 어깨를 쳐 줄 것 같다. 


그들은 왜 선택의 순간에 이해관계 같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 의리, 책임감, 동료애, 연민, 체면, 죄책감 같은 불확실한 것을 잡았는가? 

그들은 왜 소득과 지출의 실뿐만 아니라 아주 막연한,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막연한 또 하나의 실에 매달려 있는가?

그들은 왜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거나 존경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과 같은 처지가 돼버리길 택했는가?


'그 부조리가 왜 나에게 왔는가?'라는 질문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우리들의 올바른 세상을 위해 나부터 시작하겠다.'라는 다짐을 택한 사람들. 실은 난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사람 사이에서 상처입고 진실은 오해받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갈 길은 멀고, 얄팍하게 왔다 가는 삶을 살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고 상처를 각오하고 계속 나아가기엔 내가 그리 넓고 깊진 못하다는 것. 하지만 이들처럼 무언가를 선택하고 도전하며 설득해야 한다면 나의 품성이, 나의 인격이, 나의 진심이 가장 큰 무기가 되어야 한다, 이들처럼 말이다.



그의 슬픔과 기쁨

저자
정혜윤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14-04-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오래 듣고 진솔하게 기록한, 우리 시대의 귀중한 서사 정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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