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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28 본문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풀어놓는 재난 이야기에서 살아남음에 초점을 두지 않고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는지를 낯낯이 드러낸다. 그 과정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를 게 없다. 최악의 지점까지 내려가버리는 과정에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는다.
사람이든 개든 순식간에 쓰러져 죽어버리는 '빨간눈'이 무서운 병인지, 동해의 싸이코패스가 더 무서운 병인지, 화양을 봉쇄해버리는 나랏일 하시는 분들의 이기심이 더 무서운 병인지, 아니면 연민으로 금새 달아올랐다가 궤도를 이탈한듯 재빨리 자기 자신의 삶으로 회귀해버리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더 무서운 병인지, 각자 안에 지독하게 뿌리를 내린 지워지지 않는 내면의 상처가 더 무서운 병인지 순위를 매길 수 없었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어울리지도 않는 경쾌한 음악의 빠른 템포에 맞춰 끔찍한 모든 것들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고개를 내미는 듯한 소설.
이 문장을 거꾸로 이해해보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누구나 다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이니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당연히 잃어버릴 무언가 덕에 누구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다행인 걸까, 죽어가는데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나무가 거센 바람 앞에서 심어진 순서대로 부러지지 않듯 사람들도 짐승들도 타당한 순서대로 쓰러지지 않았다. 주인공 서재형 역시 살아남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끝내 이렇게 될 것을, 결국에는 쉬차와 같은 길로 올 것을, 살려고 애쓴 내가 하도 참담해서, 살려고 저지른 짓이 너무 끔찍해서, 필사적으로 불어댄 휘슬이 부끄러워서, 차마 울 수가 없었어."
그녀는 움켜쥔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겼다. 목이 답답해왔다. 하고 싶은 말이 목젖 밑에서 신물처럼 솟구쳤다. 그때 살려고 애쓰는 것 말고 무엇이 가능했겠느냐고,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재난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스테디셀러 주제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고 볼 때마다 '주인공'은 반드시 재난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당연함이 제일 두려웠다.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깊숙이 개입된 사람들만이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시련이 닥쳤을 때 그 시련 한가운데로 내가 들어가 있을 때에만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
작가는 드라마와 영화와의 경쟁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을 page turner를 쓰고 싶었단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방향은 살아남음이 아니라 살아감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내 바램을 극구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나도 내 삶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의 말 역시 살아남음이 아니라 ‘살아감’에 관한 말이다. 영원에 비추어보면 찰나에 불과한 인생일지라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기보다 제대로 더 중요한 것, 나의 이상을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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