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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죄인의 기도 본문

우물가

죄인의 기도

하나 뿐인 마음 2013. 4. 16. 06:54

  51

 

1 [지휘자에게. 시편. 다윗.

2 그가 밧 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에게 왔을 때]

3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지워 주소서.

4 저의 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5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6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

7 정녕 저는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

8 그러나 당신께서는 가슴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모르게 지혜를 제게 가르치십니다.

9 우슬초로 제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

10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

11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지워 주소서.

12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13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14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15 제가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16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제 혀가 당신의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17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의 찬양을 널리 전하오리다.

18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19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20 당신의 호의로 시온에 선을 베푸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

21 그때에 당신께서 의로운 희생 제물, 번제전번제를 즐기시리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당신 제단 위에서 수소들을 봉헌하리이다.

 

 

 

 

 

들어가면서...

누가 나에게 복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고르라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잃었던 아들 비유루가 15,11-32’를 들 것이다. 또 복음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말해보라 한다면 간음한 여인과 예수요한 8,1-11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내게 있어 용서만큼 아름답고 극적인 주제는 없기 때문이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두고 하늘에서 기쁨이 더할 것입니다.”루카15,17. 내 인생에 있어서도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의 결백을 아뢰고 억울함을 호소했던 순간보다는 나 자신의 모자람과 어리석음, 무엇보다 죄들로 인해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자비와 용서를 구하던 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억울함을 참다못해 울분을 토해내다가도 지나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꿈틀거리던 나의 부정적 욕구들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하느님 앞에 그것들을 고스란히 내어놓고 인정하며 그들-원수들?-과 나를 죄인으로 한데 묶어 자비를 청하곤 했어야 했다. 물론 진정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견뎌내야 하는 억울함의 순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그런 때가 차라리 더 하느님과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결백함에서 오는 자신감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생각만큼-내가 그동안 믿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어떻게든 그분 앞에서 도망을 쳤다. 마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숨을 곳을 찾았던 것처럼창세 3,8. 하느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며 애타게 찾으시는 순간창세 3,9이 와야 겨우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느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숨어 있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이 두려운 만큼 용서받고 털어버리고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예전처럼 회복하기를 바라는 갈망이 얼마나 크게 집요했던가.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을 털어낸 후의 기분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기쁨, 또한 내가 타인을 용서하는 기쁨,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변함없는 용서의 아버지라는 확신은 내 삶의 아주 큰 원동력이다. 그래서 나는 죄인의 기도인 51편을 택했다. 내겐 아직도 의인이기 보다는 죄인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 구조 분석

 

3-4

기원

하느님을 부르며 명령형 동사 불쌍히 여기소서’, ‘지워주소서’, ‘씻으시고’, ‘깨끗이 하소서가 쓰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용서를 청하고 있다. 즉 이 시편을 쓰는 동기는 용서받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5-8

하소연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아뢰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악한 것을 저지른 자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다. 처음엔 7절까지로 갈랐지만, 9절부터 명령형 동사가 다시 나오고, 8절의 그러나7절과의 연결로 보았기 때문이다.

9-14

탄원1

9절부터 본격적인 간청-용서받고자 하는 갈망-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간청은 계속되지만 14절까지는 주로 자신의 죄사함에 대한 간청이라고 보았기에 14절까지로 나누어 보았다.

15-19

탄원2

간청의 목적이 조금 확장되었다. 자신의 죄사함과 그로인한 기쁨이 탄원1의 목적이었다면 이 부분은 악인들을 가르쳐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 하느님께 찬양과 제사를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간청하고 있다. 18-19절이 좀 애매모호하긴 했지만, 제사를 드리는 주체가 여전히 1인칭 이므로 19절까지로 보았다.

20-21

탄원3

이 부분을 동기라고 하기엔 내 이해력이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명령형 동사가 쓰인데다가 믿음과 확신의 고백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과 확신을 근거로 고백하는 부분을 동기라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 51편 전체를 동기 부분으로 삼고 싶다. 이 부분에서는 하느님께서 호의를 베푸시는 대상이 자신에게서 시온으로, 제사를 바치는 주체도 자신에게서 사람들로 확대되었다.

 

. 구조분석에 준한 대목분석 및 묵상

 

3-4

하느님 시편저자는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고유한 하느님의 이름만을 부른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원하는-필요로 하는 은총에 따라- 하느님을 부르기 마련이다. 강력한 도움이 필요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야훼 하느님이나 이스라엘의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이라 불렀고, 사랑을 추구하면 사랑의 하느님’, 위로를 원하면 위로하시는 분’, 자비를 구하면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기 위해 가린 것 없이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이 순수한 하느님의 이름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음을 깨달은 듯하다. 게다가 다른 말을 덧붙일만한 시간도 없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시편 51편에서는 모두 5번 하느님을 부르는데(붉은색 부분), 3번이 하느님이고 주님1, 그리고 제 구원의 하느님1번이다. 저자는 하느님을 부르는 것을 굉장히 아끼고(꺼리고?) 있다. 면목이 없음을 것이다. 5번 중에서 3(16절은 연달아 부르므로 사실 4번이다)의 하느님을 부름은 모두 시편 뒷부분이다. , 용서에 대한 확신을 얻은 이후에야 하느님을 비로소 마음 놓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16절에서는 하느님을 제 구원의 하느님으로 부르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를 하느님의 자애자비에 두고 간청하고 있다. “불쌍히 여기소서”, “지워주소서”, “말끔히 씻으시고”, “깨끗이 하소서”. 4번이나 되풀이하면서(연두색 부분) 간절히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부 베네딕도 성인은 성규4장에서 착한 일의 마지막 73번째 도구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말라Et de Dei misericordia numquam desperare”라고 가르치신다.

 

2. 5-8

3-4절까지가 주로 용서 청함이었다면 5-8절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죄를 지어다는 것이 바로 저자가 처해있는 상황이다. 저자는 서슴없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어떤 판결과 심판도 달게 받겠다고 아뢴다. 자신은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공정하시고 결백하신 분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만이 자신을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고통의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공정하시고 결백하신 분께 죄를 짓고 말았다는 것.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을 법한 기억인데, 어렸을 때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꾸지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나를 믿어주시던 아버지가 겪으셔야할 실망감 때문이었다. 하느님께도 그래왔다. 꼭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성찰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문득 후회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고나서 부끄럽고 속상한 기분이 들고 나면 하느님은 나를 믿어주시는데...’하는 생각이 뒤따라 떠올라 우울해지곤 했다. 그러나 그분이 믿어주시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안다. 악한 것을 행한 것은 과거이다(6).

다른 탄원시편들을 보면 하소연 부분에서는 자신의 원수들을 하느님께 고발한다. 그들의 악한 행동을 낱낱이 일러바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억울함을 벗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시편의 하소연 부분은 그 원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아니다.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나 때문에 괴롭다. 나의 가장 큰 걸림돌이 미성숙한 나 자신일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뒤돌아보면 그렇게 속상해했던 것도 나를 무시하여 함부로 말을 내뱉은 그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과장하여 나를 억울하게 만든 그 사람이 아니라, 모진 말을 쏘아대며 밀어붙이던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때문이다. 무조건 내 탓이라는 게 아니라 그 순간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나, 너그럽게 눈감아주기는 커녕 내가 화가 났음을 어떻게든 알려주려고 했던 나, 마치 나 자신을 절대로 그런 모욕을 받을 수 없는 고귀한 사람인척 흥분하며 자존심을 내세웠던 나... 그들이 잘못하지 않은 게 아니라 성숙의 걸림돌은 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해버리는-비록 수동적인 행동으로나 마음속으로라도- 나 자신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상황에 대한 거짓 없는 고백인 것이다. 서원을 앞둔 8일피정 중에 야고버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다. “상처 날 자존심이 없는데 왜 화가 납니까? 내 죄의 100분의 1도 안되는 것으로 나를 책망하는데 왜 속상해합니까?” 이 시편의 저자라는-진짜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다윗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야훼께서 나를 욕하라고 저 사람을 보내신 것이라면 내가 어찌 감히 왜 이러시느냐고 하겠소?야훼께서 시키신 일이니 욕하게 그냥 내버려 두시오2사무 16,10-11. 속상한 나의 감정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가장 큰 걸림돌 즉, 원수인 것이다. 내 비록 그 사람 혀에 맞아 뼈가 부러졌다 하더라도집회 28,17 나를 낫게 해주실 분이 계심(10,19)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 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 주신다호세 6,1.

모든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시편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물론 문자(文字)로는 저자의 말만 나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없다. 그러나 분명 저자는 변하고 있다. 안도하고 있고, 용서의 은총으로 새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말끔히 씻어지길 원했던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의 들리지 않는 음성이 저자의 내면에서 울러 퍼진 순간이 바로 8절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편에서 하나의 전환을 이루는 장면이다. 엎드려 얼굴조차 들지 못하고 용서를 청하던 저자가 비로소 하느님을 항해 얼굴을 들고 마주보게 되는 순간,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어두운 곳에 고립되도록 둘러싸는 자아의 껍질을 깨뜨리고 하느님이 마련하신 밝은 세상으로 나서기를 애타게 바라는 저자의 마음과 너의 진실을 알고 있다. 나의 지혜를 네 안에 심어 놓았다너는 나의 사람이다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만나 드디어 껍질이 깨어졌다. 이제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이 당신께로 돌아올 길을 열어 놓으시고 희망을 잃은 자에게는 힘을 주심집회 17,24을 알기에 눈보다 더 희어지기를(9) 청한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집회1,14.

 

3. 9-14

8절 이후 용서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죄의 용서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확신하는 마음, 이것이 이제 시편저자가 처한 상황이다.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껏 쏟아내고 있다. ‘하느님께서 ~해주시면 내가 ~할 수 있다는 식이다. 자신이 깨끗해지는 것, 기쁨을 맛보는 것, 새롭게 되는 것, 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해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라는 단어가 줄어들고 대신 기쁨’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여태까지는 기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가슴 속의 진실-용서받고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을 기뻐하시는(8) 하느님이 계시기에 기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길원한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시편저자 역시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에서 그치길 원하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서 기뻐 뛰놀기를 원한다. 그 기쁨은 이제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리고 그 기쁨은 애초에 하느님께서 주셨던 것이다. 저자가 돌려달라고(14)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이라는 단어가 3번 나온다. 앞의 3절은 죄를 언급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다시 한 번 부른(12) 후에는 각 절마다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주황색 부분).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해주시길, ‘당신의 거룩한 영을 자신에게서 거두지 마시길, ‘순종의 영으로 자기를 받쳐주시길 간청한다. 19절에 가서는 하느님께 맞갖는 제사를 언급하면서 부서진 영을 언급한다.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는 내적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뜻이 아닐까? 처음 절박한 심정에서 불렀던 그 고유한 이름의 하느님을 다시 한 번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애절하게 자신이 내적으로 변모되기를 바란다는 염원이 담긴 것은 아닐까? 베네딕도회 수도자는 Conversatio Morum이라는 서원을 한다. 이 서원은 행실을 바꾸는 것으로서 이제까지의 세속의 습관들을 버리고 수도승적 생활에 몰입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서원을 발한 나, 성심수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변모되어 가는 평생의 과정에 있어 수반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과 끈기로써 규칙에 따라 전적인 수도 삶을 살기로 맹세하는 것이다. 총체적인 내적 변모에 대한 서약, 철저하게 새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성장과 변화의 요구에 직면하기로 서약했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의 변화가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세운 vision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뜻대로 변화되어 가는 것. 이 시편 저자의 지금 마음이 내가 첫서원을 발하던 그 순간, 제대 위-21절의 제단을 떠올리게 한다-에 나의 서원장을 올리던 그 순간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수도자뿐이 아니라 Conversatio Morum은 신앙인 모두에게 요구되는 덕목일 것이다. 저자는 순종의 영으로 자신을 받쳐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또한 스스로도 충실하고자 노력하겠다는 약속일 것이다.

또 하나 놓치고 싶지 않는 단어가 있다. 바로 면전이다. 13절에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길기도한다. 앞의 5절에서는 저의 잘못이 늘 제 에 있다고 했었다. 이 말은 자신의 면전에 늘 잘못이 있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자기 앞에 끊임없이 죄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하느님 면전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베네딕도 수도자가 하는 서원 중에는 정주stabilitas’라는 것도 있다. ‘서 있음을 뜻하는 stare에서 나온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이곳저곳을 여행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며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을 한 수도원에 묶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 상태인 하느님 나라 장막에 머물고자 하는 궁극 목표에 이르기 위해 특정한 수도 공동체에 몸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도-이것은 전념(專念)을 의미할 것이다!- 항구히 머무는 것이다. 하느님께만 정주함은 하느님 면전 말고는 결코 아무데도 가지 않는 것으로, 변화되지 않고 발전이 없는 듯 느껴지고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 없고 희망조차 사라진 듯 느껴지는 상태일지라도 하느님과 서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당신의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라는 간청은 모든 역경을 무릅쓰고 계속 견디어 내리라는 바램이고 또한 상처입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물러서지 않겠다는 말일 것이다.

 

4. 15-19

이제 시편저자는 악인들을 가르쳐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 하느님께 찬양과 제사를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간청하고 있다. 자신이 비록 죄인임을 인정하지만 하느님의 사랑받는 죄인임을 알고 있기에 하느님의 뜻이 자신에게서만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주님의 기도를 외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한다. 더 이상 자신의 죄에만 머무르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보다 하느님이 이루어주실 밝은 미래를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어둠을 직시하겠다고 해서 어둠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집중해야할 것에 집중하라! 나 역시 엉뚱한 문제에 얼마나 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냈는지 모른다. 타인의 말 한 마디에 온 정신을 쏟아 기도와 미사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심지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으면 절대 성장할 수 없다. 어둠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시선을 돌려야하고 시선을 들어 높여야 한다. 칼 융은 말했다. “무릇 삶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결코 풀 수는 없으며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이 벗어남에는 새로운 의식 수준이 필요함이 입증되었다. 어떤 더 높거나 더 넓은 관심이 환자의 지평에 나타났고, 이렇게 시야가 확장됨으로써 해결될 수 없던 문제가 절박성을 잃었다. 문제가 그야말로 논리적으로 풀린 것이 아니고, 새로이 더 강한 충동과 마주할 때 퇴색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삶의 주제를 얻었다. 그는 악인, 죄인-그 자신 역시 악인이자 죄인이었다!-에게 하느님의 길을 가르쳐 돌아오게 하겠노라고 약속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증언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는 가르치지 못하는 법이다. 용서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자신은 죽음의 형벌을 받을 만한 중죄인(重罪人)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구해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고백한다.

이 시편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을 수식하는 이름이 나온다. ‘제 구원의 하느님’. 용서받았음을 확신한 이후 부르는 그분 이름. 구원자이시다. 그는 자신이 구원될 것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미 구원되었다. 이제 자신의 혀로 그분 정의를 환호할 일이 남았다. 그 입으로 그분 찬양을 널리 전할 것이, 주님께서 입술을 열어 주신다면. 이 부분에서는 하느님을 3-또는 4-이나 부른다. 더 이상 하느님은 멀리 계시거나 진노하시어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맛본(10)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엄마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 위로를 얻듯 그렇게 저자도 하느님 이름을 연달아 부르고 있다. 죄인에서 찬양을 드리는 이, 제사를 바치는 이변모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첫 자손들부터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다창세 4. 제사를 바침은 피조물의 본능에 해당하는 행위일 것이다. 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사의 장면은 노아가 바치는 제사 장면창세8,20-22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손수 닫아주신 방주 안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지난 일들을 되새겼던 노아. 잃어버린 것들과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한 묵상. 하느님의 분노와 사랑에 대한 묵상. 자신의 과거와 앞으로의 삶에 대한 묵상. 그가 다시는 밟지 못할 것처럼 느껴지던 마른땅을 밟은 후 제일 먼저 한 행위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때 향긋한 냄새를 맡으셨고 무지개를 세워주셨다. 우리도 노아처럼 제사를 바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은 자의 제사를. 시편 141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저의 기도는 당신 면전에 분향으로, 저의 손 들어올림은 저녁 제물로 여겨질지이다시편 141,2.” 제사를 바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진정으로 기도드리는 사람이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의 제사-기도-는 불완전하다. 제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적 변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더 이상 견딜 수가 없구나이사1,15하신 것은 제사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은 몸을 씻어 정결히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이사 1,16하시며, 그렇게도 바라던(9) 말씀을 해주신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18.” 하느님께 맞갖은 제사는 부서진 영임을 저자는 깨달았다. 하느님께서는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보신다. 그분이 부수셨기 때문이다(10). “주께서 사자같이 나의 뼈를 부수십니다이사 38,13.” 이것은 자신을 받아들임이며 또한 하느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모든 것-특히 고통-을 그분의 섭리 안에 두는 것이다. 119편의 저자가 부르는 노래를 언제나 의미심장하다. “제가 고통을 겪은 것은 좋은 일이니119,71성실하시기에 저에게 고통을 겪게 하셨나이다119,75.”

 

5. 20-21

시편 전문(全文)을 살펴보면(1페이지 참조) 보라색으로 색칠한 ’, ‘죄악’, ‘허물등의 단어가 앞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제사’, ‘번제등의 단어(하늘색 부분)18-21절 즉 뒷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하느님 앞에 나아가 처음에 드릴 말씀은 자신의 죄밖에 없었으나, 관계가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후는 죄인이 제사를 바치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달라고 청한다. 새로이 이룩되기를(12) 청하는 것이다. 그때는 집짓는 이들이 물리친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시편 118,22. 그 돌을 머릿돌로 하여 세워진 새 예루살렘묵시 21,2이다. 그분이 함께 거처하시고 몸소 하느님이 되어 주시는 곳묵시21,3이 이룩되는 그때에 비로소 우리(복수형)는 그분께 제사를 바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편의 첫 단어는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봉헌하리이다이다. 하느님을 부르며 시작된 인생이 봉헌으로 끝을 맺는다. 아니, 영원히 지속된다. 죄인에게 제사들 바치는 그분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을 부르면서 시작했고 끝없이 제사를 올리는 삶. 우리의 인생은 봉헌의 삶이다. 우리 자신이 곧 제물이다. 사도 바오로는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올리는 향기로운 예물로 제물로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런 사랑 안에서 살아가시오.”예레 5,2.

 

마치면서...

시편 51편은 연도에 나오는 시편이다.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지은 죄를 만회할 수도, 인간적 노력으로 기워 갚을 수도 없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이다. 또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처지이기에 나의 미래를 위해서 바치는 기도이다. 1페이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윗부분에는 보라색과 연두색이 많다. 허물과 용서를 청함이 많은 것이다. 반면에 뒷부분에는 하늘색이 많다. 제사를 바침. 기도를 바침. 내 인생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수도자의 여정이다. 붉은색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 것처럼 내 삶도 하늘로 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하느님 이름을 부르는 빈도가 잦아지고 그 목소리를 더 애절해지기를 기도한다. 내가 지녔다고 생각한 것은 차츰 소진되겠지만 하느님을 부르는 목소리는 붉은색처럼 열정적이기를누구 말마따나 이곳에서의 소풍을 끝낼 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인생 자체가 제사가 되어가기를 기도한다. 시편 뒷부분이 하늘색으로 색칠된 것처럼 내 인생의 황혼도 하늘색으로 색칠되기를비록 육신은 늙어가도 내 영혼은 영원히 푸르름을 유지하기를. 아니, 오히려 더 푸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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