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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비행운 본문
김애란 작가의 단편 모음은 이 소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읽으리라 마음 먹고 너무 바쁜 시기였지만 일단 사서 침대 머리맡에 아예 고이 모셔두었던 책이다. 그리고 당분간 없을 한국에서의 마지막 휴가 때, 1순위로 읽은 책이다.
고등학교 땐가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했을 때 나를 고무시킨 건, 작가들의 놀라운 상상력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지식'이었다. 학교공부를 잘하는 지식이라기 보다는 책 한권을 위해 어쩌면 글 한 줄을 위해 그들이 삶으로든 머리로든 어마어마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말이다. 이제는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 않은 작가의 '앎'에 혀를 내두른 적도 있었고(이제는 그의 앎에 박수칠 마음이 없다. 그 앎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 여겨지기에...),
대학생이 되어서 읽은 어떤 책을 쓰기 위해 박인숙 작가가 아예 삶의 자리를 옮겨서 철저히 이방인이 되어 일단 '살기' 시작했음을 알고는 '사람이 뭔가를 마음 먹었으면 이 정도는 해야하지 않나' 싶었다.
이런 면에서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을 이야기하자면... 그녀 역시 철저히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세상 언저리에 머물렀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단편 하나하나마다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 인물이고 사는 곳, 하는 일들이 저마다이다. 하지만 마치 오밀조밀 판자촌 한 골목에서 움츠린 어깨를 매일 스치며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이야기 같았다. 각기각색인 사람들이 실은 너무나 닮았다고나 할까...
조카 현진이가 물었다. 비행운이 무슨 뜻이예요?
시간이 좀 지난 일이라 작가의 말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단어 역시 여러가지로 읽혀진다.
절대 손에 잡히진 않고 조용히 물러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구름일수도 있고,
행운 따윈 절대 내 인생에서 내것이 될 수 없다는 말 같기도 하고,
비행만 일삼으며 영원히 사춘기처럼 겉돌아 다닐지도 모르는 운명을 타고 났을지도 모른다는 점괘일 수도 있고,
혹은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채 꿈만 꾸다 떠날지도 모르는 운명...
작가가 생각했던 비행운이란 단어의 의미가 이것 중 무엇이었는지도 이젠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편 하나씩 읽어갈 때마다 제목의 의미가 바뀌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 제목의 의미 하나하나가 이 책을 읽은 나의 리뷰가 되었고.
마음에 와 닿아 남겨둔 몇몇 문장들이, 지금 읽어보니 참 서글픈 말이구나 싶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
"어머니가 이따금 하는 말은 '내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느냐'는 거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집 안에 곰팡이가 펴서 그런 거라고 대꾸했다."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
"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
"언니. 가을이 깊네요. 밖을 보니 은행나무 몇 그루가 바람에 후드득 머리채를 털고 있어요.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저는,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들어요. 휙휙- 차들이 바람을 찢고 지나갈 때 내는 그런 소리를요. 마치 제가 8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예요. 왜 오락의 고수들 있잖아요. 걔네들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총알이 아주 커다래 보인다던데. 다가오는 모양도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느껴진다 하고요. 저도 그랬으면 싶어요.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예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