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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요한 1,35-42 본문

요한의 우물/요한 1장

요한 1,35-42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45

오늘 복음은 크게 ‘추종’과 ‘부르심’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예수님 호칭의 변화를 중심으로 나누어 보았다.

 

A : 35-36절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B : 37-38절                                        ↓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C : 39-41절                                        ↓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D : 42절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체험이 있고 나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볼 줄 아는 또 다른 시선을 얻게 된다. 믿는 이들은 체험을 중심으로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달라지곤 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건(체험)이 일어난 후 예수님의 호칭이 바뀌어감을(하느님의 어린양→라삐→메시아) 알 수 있다. 끝에 가서는 시몬의 이름마저 바뀌어 버린다. 예수님께서 바꾸어 버리신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의 변화는 곧 인간의 영적 성숙이며 그 영적 성숙은 우리 이름의 변화, 존재의 변화를 가져온다.

 

요한과 제자 두 사람(안드레아와 또 한명)과 예수님과 시몬이 등장한다. 요한은 복음서 전체에서처럼 앞부분에 나와 길을 터주고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그는 주님의 길을 곧게 냄으로써(요한 1,23절) 예수님과 사람들의 만남을 이루어준 후 모습을 감춘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언제나 깊은 묵상거리이다. 안드레아의 모습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요한의 제자였으니 진리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있었으리라. 따라나서고(37절) 함께 묵고(39절) 소중한 피붙이를 찾아가 자신이 발견한(NRSV성경에서는 found라는 단어를 쓴다)메시아를 알려주고, 그것도 모자라 직접 데려다 준다. 드러나지 않지만 너무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데 안드레아 사도를 떠올리면 왜 이렇게 가슴 한켠이 싸리할까? 열심히 한만큼 드러나고 싶은 내 안타까운 욕구를 종종 만나기 때문이리.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의 고백이다. 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증언하였다(요한 1,34). 그러나 다시 그곳에 서서 그분을 눈여겨 본다. 자신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야 함을 알았을 것이다. 그분을 위해 요한은 모든 것을 한다. 제자들을 보내면서도 그의 눈은 예수님을 향한다. 눈여겨본다. 오랫동안 준비한 그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경외심으로 눈여겨보는 것이다. 그의 고백은 한결같고 그의 시선 또한 한결같다.

 

라삐

이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호칭과 ‘라삐’라는 호칭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볼 차례이다. ‘따라갔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라삐라는 말은 요한이 일러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백이었다. 스승으로 모실 마음이 있었기에 따라나설 수 있었고 따라나섰기에 그들은 ‘라삐’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나의 의지가 다분한 일일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길 원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호칭도 바로 ‘스승’이다. 나는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신다. “무엇을 찾느냐?” 목적을 깨닫길 원하신다.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자신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도록 이끄신다. 한참을 그들과 함께 지내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15; 마르 8,29; 루카 9,20)하고 질문하실 것이다. 아직은 이 질문의 단계가 아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을 물으신다. 분명히 알고 따라오라는 말을 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무엇을 찾는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다만 어디에 묵고 계시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함께하고 싶어한다. 예수님은 이제 막 제자의 삶을 시작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고 당신이 머무시는 자리를 내어놓으신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신을 그저 기도로만 체험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당신 몸을 직접 내어놓으시고 “직접 먹고 마셔 보아라. 온 몸으로 나를 느껴라. 너를 향한 내 사랑을 고스란히 체험하여라.”하시며 미사 성제(聖祭)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신다. 예수님을 갈망하던 나를 수녀원으로 초대하시던 그 때의 예수님이 떠오른다. “와서 보아라.” 그들은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이 또 한 차례 바뀐다.

 

메시아

‘함께 묵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함께 묵음’은 다른 사람을 그분께 데려갈 힘과 용기를 준다(요한 1,42). 메시아라는 고백은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모시고 싶어서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모시기 싫다고 해서 내 구원자가 다른 분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요한복음의 메시아 고백은 복음서의 앞부분에 나온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중간을 넘어서야(마태 16장; 마르 8장; 루카 9장) 베드로의 입을 통해 고백되며 이 고백을 기점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다.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과의 온전한 동참이 시작된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고 종내에는 부활마저도 동참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메시아 고백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케파

이제 베드로의 존재가 바뀌었다. 공관복음에서도 메시아 고백 이후 시몬의 이름이 바뀐다. “너는 베드로이다.”(마태 16,18) 그러나 요한복음과는 시제(時制)가 좀 다르다. 요한복음은 미래시제이다.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42절) 공관복음과는 달리 이제 막 예수님을 만난 시몬은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다. “너희에게 어떻게 하여주는 것이 좋을지 나는 이미 뜻을 세웠다. 나는 너희에게 나쁘게 하여주지 않고 잘하여 주려고 뜻을 세웠다. 밝은 앞날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예레 29,11) 그분은 이미 뜻을 세워두셨다. 요한처럼 시몬을 눈여겨보는 예수님의 시선에도 사랑이 담겨져 있다. 오랫동안 아니 처음부터 사랑했던 그를 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의 시몬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시몬, 당신을 죽도록 따르겠노라 덤비는 거침없는 사랑의 시몬을, 형편없이 무너지며 당신을 배반하는 시몬을, 결국은 죽음에까지 당신을 따르고야마는 당신의 사람 시몬을 보시는 것이다. 이제 시몬은 누가 뭐래도 베드로이다. 나 역시 누가 뭐래도 성심수녀이다. 맞갖은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희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나를 두고 태초에 세우신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나보다 더 그분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 생각해본다. C와 D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예수님을 내 스승으로 모시고자 진작부터 맘먹고 이렇게 함께 묵고 있지만, 아직도 그분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언젠가부터 내 신앙이 거의 바닥이 나고 있음을 절박한 심정으로 느끼고 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홀로 배를 타고 흘러가다가, 날은 어두워졌고,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배에 물이 차오르는 걸 발견했지만, 망연자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런 심정이었다.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막막함. 예수님 앞에 어떻게 앉아야 할지도 모르는 이 난감함. 그러다 가만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른이 되어야 했다. 강요라기보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일찍 보내드려야 한다는 강박감과 무남독녀 티를 절대로 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나혼자 발버둥치며 세월을 앞당기려 했다. 그래서 남을 배려해주는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에서 벗어나고, 또 무남독녀임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혹 안다 하더라도 ‘무남독녀라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난 그렇게 어른이 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수녀원에 와서도 여전했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외롭고 사랑받고 싶고 떼쓰고 싶고 자유롭게 놀고 싶은데, 난 무슨 오랜 세월 도닦은 어른 수녀처럼 컴컴한 성당에 앉아 잡념을 떨치며(유유히 떠나보내는 척) 그저 마음을 비우고 -결국은 아무 느낌도, 생각도 없이- 오래오래 앉아있는 척 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하고 친할 일이 없었다. 주절주절 말도 하고, 화나면 떼도 쓰고, 어리광도 부리고, 기대어도 보고, 울면서 털어놓고 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데 난 예수님 앞에서조차 성숙한 어른이고 싶어 했다.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 내 자신을 발견하고 나니 부끄럽다기보다 차라리 후련했다. 그제야 예수님께 약속을 할 수 있었다. 당신 앞에서 정말 솔직한 내 속내를 다 드러내보이게 해달라고. 듣기 좋으시라고 미리 준비한 멋진 단어들을 나열하며 진실을 숨기지 않게 해달라고. 하고픈말 있으면 무조건 당신께는 하게 해달라고. 알아서 잘할테니 너무 걱정말라는 거짓말은 절대 안하고 싶다고. 이제는 성숙한 수도자인척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드리며 누가 나더러 유치하다 해도 유치한 언어를 그대로 드리기로 했다. 까발려짐을 기뻐하기로 했다. 비록 조잡한 고백이 되더라도 나는 이대로 고백할테고, 그제서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나는 당신을 메시아로 만났어요.” “앞으로 너는 성심수녀라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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