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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17,1-9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17장

마태 17,1-9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3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Transfiguration)에 관한 복음이다. 지난 주 복음(마태4,1-11)에서는 영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신다. 특히 8절에 보면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께 변화를 요구한다. 그 변화라는 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것이고. 줄친 단어들은 오늘 복음에서도 반복되며 내 묵상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증인처럼) 3명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달리 제자들에게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께서 변화하신다. 내가 변해야지 세상이 변한다는 말,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셈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대체물로 자신을 꾸미곤 한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 마치 자신이 고결한 신분이 되는 듯 여겨 기를 쓰고 기어오른다. 값비싼 옷으로, 큰 씀씀이로, 지식으로, 그럴듯한 말로, 인간관계로(관계의 이유가 情이 아닌 것)...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신다. 대체물로 꾸밀 이유가 없으신 까닭이다. 수도복도 마찬가지겠지? 내 존재가 수도복을 뚫고 나와야 되는데, 혹여라도 내가 드러날까 수도복에 숨어서 고결한 척, 거룩한 척 나아가 변화한 척 한다면 이미 나는 죽은 몸뚱이일 뿐이겠지. 하여튼 자신 말고 다른 무언가를 보여준 악마와 달리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신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6절) 변모하신 분은 오직 한분이심이 드러난다(8절).

 

때마침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통에 베드로는 더욱 흥분하여 무언가를 말하게 되는데(4절. 마르코복음사가는 같은 이야기를 전하며 9장 6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고 전한다. 루가 복음사가도 마찬가지. 루가9.33) 자신의 의지만 얘기할 뿐이다. 물론 베드로의 이런 행위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종종 내게서도 발견되는 모습이니까. 베드로가 꿈꾸던 것은 上昇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따라나선 분이 높으신 분이어야 했고 고로 자신도 높아지길, 그만한 보상이 있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마태16,21-23;19,27-30 참조). 어쩌면 소수 그룹에 끼어 산을 오를 때부터 흥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평소 흥분실력으로 보아서는... 충분하지. 베드로는 빛나는 스승과 율법의 아버지 모세, 영원한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에 들뜬 나머지 日常이 아닌 그 황홀한 순간(순간적 위로?)에 머무르길 원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당신 앞일을 밝히시며 당신 뒤를 따르기 위해 각자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하셨음(마태16,21-23)에도 불구하고 그는 꿈같은 현실을 부여잡고 싶어했다. 자신이 원하는 위로를 받고 싶었고 옳다구나 싶어 그 순간을 붙든 것이겠지. 게다가 자신이 무언가를 잔뜩 해드리고 싶어하는 베드로. 그러나 누가 선뜻 이 베드로를 탓할 수 있으랴. 나는 할 수 없다. 나 역시 순간적인 기도의 위안에 머물고 싶어하고, ‘기왕이면’ 하면서 쉽고 편한 쪽으로 기울어질 때가 숱한 인간이니까. 또한 내가 무언가를 많이 해줘서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검은, 한편으로는 불쌍한 욕구가 매순간 치밀어 오르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나의 마음을 알고 계시고 치유해 주신다(7절).

내게도 이런 기억이 있다. 종종 떠올리게 되는, 내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어린 시절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중학교 1학년 때쯤인가,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즈음 동아쇼핑이란 게 생겨서 그곳을 두리번거리며 놀러가곤 했었다. 그러다 뭔가를 본 순간 선물하고픈 생각이... 당장 모아둔 돈은 없고, 고민하다가 뜬금없이 용돈을 올려달라고 했었지. 당연히 대답은 No였고. 나는 혼자 화가 무지 났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한심한 일인데 그때의 내게는 큰일이었지. 왠지 아버지가 받으면 좋을 것 같고, 저건 엄마가 좋아할 것 같고. 그런데 돈은 없고. 드리고는 싶고. 내가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 정작 부모님의 마음은커녕 이성적인 사고도 거의 마비가 되어버린 체험. 얼마나 자신에게만 매어 있었는지... 당시 난 나의 행동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지만, 글쎄 지금은 ... 자신에게서 헤어나지 못한 욕구덩어리를 본다. 그때의 나나 베드로 모두 많이 다음어지고 깎여야 한다. 나는 부모님께, 베드로는 예수님께 일방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아뢰고 은근히 원하는 것만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남을 위하는 듯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자기위안의 방법. 그러나 일방적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는 법. 이제 5절의 체험 후 그는 비로소 자신을 낮추었고(6절 ‘얼굴을 땅에 대며’) 그때서야 예수님께서 말을 건네오신다(7절). 시간이 된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지어 드리고픈 초막에 대해 잠깐. 나 역시 수도원이라는 하느님의 장막에 사는 처지인지라 시편 27편에 마음을 많이 두게 된다.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일찍이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 아래 야훼의 분부대로 성막을 지었었다. 이후 다윗왕은 자신의 뜻대로 (물론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장막(=집)을 지어드리고자 했지만 허락하지 않으셨다(2사무 7,5f). 그렇다고 해서 다윗에 대한 사랑마저 거두시진 않으셨지(7,15). 하느님 뜻과 인간의 뜻은 어긋날 때가 이렇게 종종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우리는(인간은) 하느님께 장막을 지어드려야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실 수 있도록 내 안에 장막을 마련해야 하는 것(1고린 3,16-17)인데... 머리둘곳 조차 없으신 예수님께서(마태8,20)께서 내 안에 오시도록(레위 26,11-12) 하는 것인데... 그렇게 온전히 나를 비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너무나 번듯하게 치장되어 있는 나의 욕구는 너무나도 집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단순한 죄나 어두움이 아니라, 나의 인간됨(本性=나약)과 내가 어쩔 수 없이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상처들로 인한 아픔이라는 걸 예수님은 아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사 때 고백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부단히도 무언가를 드리겠다는 것을 멈춤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을 이제민 신부님은 “놔둠의 영성”이라고 한다. 나를 비운다는 것. 기도한다는 의식 없이 고요히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 수도자로서의 내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지. 아직도 나의 원의가 펄떡펄떡 살아 뛰고 있지만.

 

베드로의 거침없이 이어지는 자신이 세운 계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리는 소리! 나는 이 가운데 부분의 소리를 전환의 기점으로 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베드로가 너무나 안타까우신 까닭인지 하느님께서 직접 얘기를 해주신다. 그의 흥분(그야말로 벅찬 감격일테지)이 어떻게 마무리 지어져야 하는지를 일러주시는 하느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들음은 성서 곳곳에서 그 중요성이 나타난다. 오늘은 루가복음 11장 27-28을 예로 들고 싶다. 한번 읽어보시고. 이 말씀을 기점으로 해서 흥분하여 자신의 말을 쏟아내기 바빴던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침묵 속에서 자세를 낮추게 되었고(4→6절), 높은(?) 이들과 대화하시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오신다(3→7절). 드디어 듣는 자세가 되는 순간이다. 기도 역시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의 말은 적어지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자 고요해지는 법.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침묵하는 영혼은 견고합니다’라고 했지.

 

예수님의 대화는 touch를 동반한다. 어루만지심.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손은 곧 치유이다. 병원에 있으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인데, 우리는 다친 상태에서 치유를 갈망하기 보다는 단순한 위로를 훨씬 더 많이 갈망하는 것 같다. 새살이 돋기 위해서는 내 상처를 헤집어서 내 몸이 분발하도록 해야(물론 그 고통은...) 치유가 되는데, 나는 아파서 그런 것 안했으면 좋겠고 그저 내보고 ‘많이 아프지요?’라고 한마디 하면 한결 나은 것 같았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내 상처가 언제 나을지 알 수 없는 법. 헤집지 않으면, 고통스러워도 소독을 제때에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덧나게 되는데... 삶도 그렇다. 말은 치유되길 원한다 하면서 실은 치유를 거부하고 있을 때가 많잖아? 아프니까... 괴로우니까... 잘은 몰라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인정을 무척이나 받고 싶어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언제나 제일 먼저 흥분하고, 무턱대로 저지르고, 대답도 먼저 하고... 물 위를 걸은 것도 그요,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제일 먼저 물어 뛰어든 것도 바로 베드로니까.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오늘(사실 워드를 치는 오늘은 22일 베드로 사도좌 축일이다)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시지. 그의 마음을 아시니까. 표현은 거칠지만, 왜곡되긴 했지만 예수께 대한 그의 사랑을 그분은 꿰뚫어보시니까. 가난한 어부이며 변변찮은 아들이자 가장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는, 그런 아픔 때문에 아마 생애 마지막으로 믿고 따르고자 결심한 예수님의 인정을 받기를 간절히 원한 건지도. 예수님은 이런 그의 상처를 치유하고 계신 것 같다.

 

이제 천상적 존재로 비쳐진 예수님의 모습도 평범한 일상의 모습, 인격적 예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2→8절). 되돌아왔다는 말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일상의 예수님, 인격적 예수님을 비로소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 한분만! 베드로가 얼굴을 들었을 때 혹시나 실망하진 않았는가 모르겠다. 부여잡고 싶었던 꿈같은 일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었는데, 어느새 파도처럼 밀려가고 가난한 모습의 예수님만 덩그러니... 모세와 엘리야는 없다 하더라도 위엄찬 목소리의 주인공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사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번쩍번쩍 하는 가운데 이야기를 하신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랴. 중요한 건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 언니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 오직 한분이신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시고(일어나시오) 우리의 두려움을 걷어주시는(겁내지 마시오) 예수님을 체험한 그들은 이제 산을 내려온다. 예수님은 겸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9절. 이 부분은 언니한테 맡겨야겠다. 이 금령의 의미는 뭘까?? 무엇을 기대하지 말라는 건가? 아직 내 묵상은 이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다.

 

이번주 묵상은 내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베네딕도 수도자로서 나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나는 어떤 모습인가? 유혹자? 예수님?’ 신앙은 위로가 아님을 나 자신도 알아야 하고, 나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몫을 지닌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싶어 교회로 모여든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만나는 이는 아주 드물다. 만날라치면 도망가버리는 우리들. 물론 위로의 하느님이시긴 하다. 그러나 그런 아주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되면 위로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리. 변모의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아니었다. 결국 제자들 가슴에 무언가를 새겨 넣으신 것이다. 역시 이 복음을 통해 내 가슴에도 무언가를 새겨넣으신다. 베네딕도 회원인 나, 세상을 위해 왜 변모해야 하는지를. 변모의 이유는 개인적으로 훌륭한(?)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함이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나의 이유이다. 언니가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지 심사숙고해 보는, 그리고 자신의 원의와 예수님의 원의를 한번 맞추어보는, 무엇보다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갈망하는 한주간이 되길 기도하며...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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