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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22,15-21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22장

마태 22,15-21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35

예수께서 성전으로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마태 21,23) 하셨던 4번째 비유. 바리사이들이 직접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과 헤로데파 사람들이 대신 등장한다. 점점 강도가 강해지는 예수님의 비유 때문에 얼굴 드러내기가 어려웠든가(21,46 ‘군중이 무서웠다) 아니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예수님 비유는 점점 그들을 죄였음에는 틀림없다. “세라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21,31) → “하느님은 당신네한테서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소출을 바치는 민족에게 주실 것입니다”(21,43) → “부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22,14)

 

다섯 부분으로 본문을 나누어 보았다.

-15절 바리사이들의 못된 의도. 올가미를 씌우려함

-16-17절 파견과 질문

-18절 못된 의도를 알아채신 예수님

-19절 데나리온 한 닢

-20-21절 가르치심

 

이제 본문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15절.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의논을 했다. 말로 씌우는 올가미. 말 한마디가 큰 약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지... 집회서 저자는 말한다. “매에 맞으면 맷자국이 날 뿐이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많지만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은 더 많다.”(집회 28,17-18) 오죽 했으면 다음 절에서 행복을 선언할까. “혀의 공격을 당하지 않는 사람, 그 광분을 겪지 않는 사람, 혀의 멍에를 지지 않고 그 사슬에 묶이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19절) 더 나아가 “혀 때문에 당하는 죽음은 무서운 죽음이고 그런 혀보다는 차라리 지옥이 낫다.”(21절)라고까지 말한다. 굳이 설명치 않아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지옥보다 더한 고통에 떨어지기도 한다. 사부 베네딕도 성인께서도 “많은 말에서 죄를 피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수도자들에게 특히 “침묵”이 요구되는 것이리라.

 

16-17절.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는 모습(루가 7,18f)과 비교를 해본다. 요한은 제자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확인했고 제자들이 ‘복음(루가7,22)’을 듣도록 했다. 요한은 당시 크게 존경받는 예언자였으며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이는 없습니다”(루가 7,28)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제자들이 더 큰 진리(예수님)를 향해 나아감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길을 터주었다(요한 1,35f). 반면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하기에는 곤란한 행위를 제자들이 대신 하도록 만들었다. 질문을 자세히 읽어본다. “선생님, 저희가 알기로 선생님은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이 가르치십니다. 또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으시니 사실 사람들의 신분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쳐도 됩니까, 안 됩니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준비한 질문이기는 하나 이 질문은 바리사이 자신들 마음 안에 내재한 혼란이기도 하며 자신들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 미루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유일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분뿐이신데…황제에게 돈을 바치다니’라는 마음이 그들 안에 죄의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 있다. 이것이 의식성찰의 중요요소이다. 반복되는 행위가 나도 모르게 내 영혼을 나태하게 만드는 것. 예를 들자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불평의 말 같은 것들이다. 불평을 입밖으로 내뱉음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되씹게 되고 하루 동안의(어떤 때는 며칠, 몇 달까지) 기분도 어둡게 만들어 간다. 이런 요소가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한다. 미루는 버릇, 경청하지 않는 습관, 툭툭 내뱉는 말투 등등. 하지만 무조건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자극이 되곤 하니까…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으시니 사실 사람들의 신분을 가리지 않으십니다”라는 말 역시 그들 안에 내재한 갈망처럼 느껴진다. 아니, 고백해 보자면, 나의 갈망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인정(認定), 애정, 칭찬, 험담, 무관심…에 구애받지 않는 초연함. 이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는 것들이고 하느님 한분만 영원하심을 깨닫는 것.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 40,6.8) 글쎄, ‘초연함’이 지닌 특성으로 보아 갈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로마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던 그들이니까…

 

18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못된 의도를 알고 계셨다.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예레 17,10)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은 처벌자가 아니라 구원자시다. 그들 마음 속을 꿰뚫으신 예수님은 이제 멸망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다.

 

19절.

데나리온 한 닢. 데나리온은 로마 은화이다.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는 로마은화로 바꾸어 바쳐야 했고, 성전세도 마찬가지이다(마태 21,12에 환전상들이 나오는 이유). 세금은 바쳐야할 무엇의 ‘대신’으로 쓰인다. 앞에서 나온 제자들은 바리사이들을 ‘대신’하는 존재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그들의 죄악을 ‘대신’ 기워갚고자 당신 목숨을 바쳐 구원해 주셨다.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분. “나는 그대들 한가운데 시중드는 사람처럼 있습니다.”(루가 22,27)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처럼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까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7-8)

이 데나리온 한닢을 예수님께 가져오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들의 모습과 꼭 닮은 동전을 들고서. 그러나 부정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긍정의 의미를 부여해 보자면, 주인을 위해 맞갖은 모습으로 바뀌어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따로 떼어진 이후 세상의 옷은 벗고 평생 수도복만 입는 우리들. 주인에게 바쳐지기 위해 맞갖은 모습으로 바꾸어진 셈. 우리가 드리는 성무일도는 기도하지 못하는 세상을 ‘대신’하여 바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이들도 21절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시오”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순간, 부정의 의미가 긍정의 의미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하느님의 백성에 맞갖은 모습으로 바꾸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20-21절.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오?” ‘초상’이란 말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27참조)라는 말씀을, ‘글자’라는 말은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3)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누구의 것인가? 하느님의 모습이 박혀있고 하느님 법이 새겨져 있는 나는 누구의 것인가? 성모님의 노래, “이 몸은 주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루가 1,38 참조)를 떠올려 본다.

또, 황제는 누구의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1독서인 이사야 45,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21절의 말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시오”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치유자이신 분은 그들 안에 내재한 혼란, 끊임없이 죄의식을 일으키지만 스스로는 원인을 알기 어려운 혼란의 원인을 고쳐주시고, 이 말씀을 지금 대하고 있는 나마저도 고쳐주고 계신다.

 

“아무에게도 구애받지 않으시니 사실 사람들의 신분을 가리지 않으십니다”라는 말씀은 나의소원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다 함은, 간섭받지 않으려는 옹졸한 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 어느 것에도 마음 두지 않고, 그 어떤 상처주는 말과 행동에도 지배당하지 않으며 한분만 바라보며 사는 것. 시선 또한 내 기호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살다보면 구애받지 말아야 할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며(그것도 내 스스로가!!!) 지쳐가기도 하고, 구애받아야 할 것(수도규칙이나 하느님 계명, common sense?…)에서는 오히려 벗어나려고 하는 때가 종종 있다.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치유자이신 예수님의 인도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다가서는 날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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