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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25,1-13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25장

마태 25,1-13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33

이 복음은 한 주간 내내 나를 괴롭(?)혔다. 미리 써두긴 했지만 보기가 싫어서 책상 위에 팽개쳐 두었다가 금요일 밤이 되어서야 겨우 뭔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거의 일주일을 복음뿐만 아니라 내 생활마저 나를 들볶고 있었다. 내게 맡겨진 무게들, 내 책임이 아닌데도 내게로 미루어진 일들이 버거워졌고,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나는 담당이 아닌데 왜 내가 이걸 하고 있지?’하는 불평이 고개를 디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복음을 볼 때도 그랬다.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않은 처녀들을 ‘이기적인’ 처녀라 부르지 않고 오히려 ‘슬기로운 처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함께 못 들어갈망정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냉정한 그들에게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부족한 채로 함께 나누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아예 둘이서 하나씩 드는 방법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 이런 곳이 천국이란 말인가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나아가 사람들이 내팽개친 일들을 꾸역꾸역 마무리하다가 기름이 다 떨어진 기분, 그런데도 아무도 내게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 같은… 하여간 기분이 우울모드였다. 함께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하자니, 원망도 생기고…

 

그런데 나같은 유형의 사람이 조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가 번쩍 생각났다. 그런 후 “상인”이라는 단어가 연달아 번쩍! 복음을 읽으면서 ‘상점’에 가서 사는 게 아니라 ‘상인들’(dealer)에게 가서 기름을 산다는 게 좀 의아했었다. 아! 사람의 인정을 구하고 있었구나. 내가 또 기꺼이 희생하다가도 사람들의 인정이 없으면 어느새 힘을 잃고 마는구나 싶었다. 이 부분에 생각이 미치기 시작하자, 나는 얼른 성당으로 달려가 성체 앞에서 마르타 복음(루가 10,38-42)을 읽은 후 마음을 정리했고(마르타는 일 중심인 사람이라서 분주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아낌없는 노고를 마리아가, 무엇보다 예수님이 몰라주고 계시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그 누구, 예수님의 ‘아는척’이 필요했다.) 예수님의 충고 ‘필요한 것 한 가지’(루가 10,42)를 오늘 복음의 문제점 ‘기름’과 얼른 연결지을 수 있었다.

 

수많은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 중의 하나인 열 처녀 비유. 등장인물은 열 처녀와 신랑(뒷부분에서 어리석은 처녀들에 의해 ‘주님-LORD가 아니라 lord이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소리 뿐이다(상인은 언급되되 등장하지는 않는다). 열 처녀는 ‘어리석은’ 다섯과 ‘슬기로운’ 다섯으로 각각 ‘나머지(11절)’ 처녀들과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로 수식어가 바뀐다.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로는 ‘그때(1절)’, ‘늦어지자(5절)’, ‘한밤중에(6절)’, ‘사러 나간 사이(10절)’, ‘나중에(11절)’, ‘그 날과 그 시각(13절)’이다. 이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중심으로 구조를 나누어 보았다.

이밖에 내게 묵상 실마리를 준 단어들을 나열해 보자면, ‘등(5번)’, ‘기름(3번)’, ‘그릇(4절 1번)’, ‘상인들(9절 1번)’, ‘마중 나가다’(2번)와 ‘왔습니다’(10절 1번)이다.

 

첫째 부분(1-5절) : “그 때” “늦어지자”

둘째 부분(6-10절) : “한밤중에” “사러 나간 사이”

셋째 부분(11-13절) : “나중에” “그 날과 그 시각”

각 부분의 시작에 나오는 시간(‘그때’ ‘한밤중에’ ‘나중에’)은 우리의 시간을 의미하는 듯 보이고, 마지막에 나오는 시간(‘늦어지자’ ‘사러 나간 사이’ ‘그날과 그 시각’)은 신랑이 오는 시간, 즉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시간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하늘나라에 가까이 있으나 아직 깊이 체험하지 못한 “그때”에는(‘평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이 “늦어지는 듯” 보인다. 기름을 준비하는 시기는 위기가 닥쳤을 때가 아니고 바로 이 시기, 평소에 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졸거나 잠들 수 있다(5절). 그러나 기름을 채웠느냐 않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눈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시기에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이 가려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두움 중에 있을 때(“한밤중”)는 한눈파는 시간, 즉 엉뚱한 행동을 하는 시간에(“사러 나간 사이”) 예수님이 오시곤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어둠의 시기에 보이지 않는 “소리”(6절)를 듣게 된다. 물론 이 소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평소”-기름을 채워두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달려있다. 평소에 기름을 채우지 않았다면 우리의 등은 꺼져갈(8절)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예수님 보다 먼저!!! 사람-상인들-을 만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을 만나 내 허전함을 채우다보면 혼인잔치의 문은 닫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마중 나가다’라는 단어는 우리 편에서의 행위를 부각시켜 신랑(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마중 ‘나가다’)고 여기게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오신다(“신랑이 왔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만남을 주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이시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 “원의를 일으키시는 분도 실천케 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문이 닫혔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벗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루가 11,5-13)를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말합니다.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어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입니다.”(루가 11,9-10)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그저 모두의 신랑이신 분을 ‘나의 신랑’으로 체험하게 된다.

 

미래(“나중에”) 즉 앞으로 펼쳐질 내 시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은 예측할 수 없다“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속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의 어둠과 하느님이 판단하시는 어둠도 다르다. 우리의 종말과 그분 종말도 다르다. 이미 문이 닫힌 듯 여겨지지만,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삶을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늦었다고 할 때에도 그분은 ‘시작’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두드리시오,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경고의 말씀은 들려온다. 문이 닫혀버리면 모두의 신랑이신 분을 “나의 신랑이시여”하고 부를 수 없고 그저 “주님, 주님(lord)”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몇몇 단어들을 좀 자세히 들여다봐야겠다. 기름, 그리고 그릇. 등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것.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때 여러분은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에페 5,8) 그렇다면 등은 우리자신 즉, 우리의 통합된 존재 자체-나 자신!-를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릇을 행위차원-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희생, 봉사, 애덕 등등-이라고 한다면 기름은 내적자세-내면의 정신으로써 열린 마음, 낮아지려는 자세, 참된 사랑, 온전한 믿음, 진실, 겸손 등-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냥 기름을 갖고 있다고 하지 않고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갖고 있다고 표현한 이유가 바로 행위에 서린 올바른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의 행위에 올바른 내면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고 등은 곧 꺼져버릴 것이다. 나의 봉사가 곧 힘을 잃어버린 것처럼. 또한 기름이 없는 등은 온전한 나 자신이 될 수 없기에 아무리 애타게 ‘주님, 주님’(11절)하고 불러봐도 그분은 ‘모른다’(12절)고 하실 것이다. 껍데기 뿐이기 때문에,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분이 ‘애초에 지어내신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름은 ‘평소’에 부지런히 내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도 내 신앙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 내 곁에 아무리 신앙 깊은 도반이 있다한들 그에 힘입어 내 신앙을 튼튼히 하지 않는다면, 내 등은 꺼지고 말리라. 이 기름은 예수님이 내게 일러주신 ‘필요한 것 한 가지’이다.

 

요 며칠 사이 나의 시간도 그랬다. 잡다한 일로 이미 몸은 지쳤고 마음마저 지쳐버려 불평불만으로 이 일이 마무리 지어지는 듯 여겨졌지만 결국 그 어두움 안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고(6절 “소리”), 사람의 인정으로 기울어지려는 내 마음을 예수님 쪽으로 기울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내게로 성큼 다가오셨다. 나의 원의보다 그분의 사랑이 언제나 크다. 이제 이 경험은 예수님과의 소중한 만남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람의 위로나 인정, 애정 등이 일시적 방편은 될 수 있으나 궁극적 치유는 그분이 하신다.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먼저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랑을 만나기 이전에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도 예수님의 빛 안에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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