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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본문
김원영 지음. 문학동네.
'입장'(立場)들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입장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입장을 헤아릴 줄 알고
그 입장에 다가갈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들려주는 이야기마다 숙연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이 이토록 투명하고 솔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사람이 이토록 겸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사람 마음이 이토록 넓고 깊을까.
나이가 들어가는 건지
예전에는 탁월하게 재미나는 글이나 배울 점이 많은 글에 마음을 뺏겼다면
언젠가부터 '빼어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도 모자라 질투와 경외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 책도 그랬다. 이 작가가 그랬다.
p.9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당신이 나를 배려해 내 앞에서 발레를 추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p.10
"우리는 각자의 능력을 갈고닦으면서 타인과 차별화되기를 바란다. 이런 경향은 때로 맹목적인 비교와 경쟁으로 우리를 몰아치지만, 그런 의지가 전혀 없다면 우리 개개인은 고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p.10
"그 능력이 무엇이든 나는 이 능력들로 당신과 차별적인 개인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가 잘하는 영역을 섬세하게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당신의 힘'을 믿으면서 나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할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법 앞의 평등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차별적인 능력을 지닌 개인들이 서로의 동등한 힘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고유한 개인이면서도 더 큰 세계의 일부가 된다."
p.11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힘을 신뢰하면서도 자신만의 능력을 지극히 차별적으로 닦아나가는 개인들의 공동체란, 일견 상반된 두 개념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의 기예art로만 달성될 수 있다. 달리 말해, 그것은 곧 춤출 수 있는 자들의 공동체인 셈이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작용하는 힘(중력)에 몸을 온전히 맡기면서도, 동시에 그 힘에 맞서는 각자의 몸의 기술(능력) 사이에서 움직이기. 그것이 내가 아는 좋은 춤, 잘 추는 춤이다. 따라서 좋은 춤, 잘 추는 춤을 향한 몸들의 역사를 살피는 것은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개인들로 이뤄진 공동체를 그려내는 한 가지 방법이다."
p.89
""가파른 경사길에서는 밀지 말고 지그재그로 당기듯이, 자갈길은 앞바퀴를 살짝 들고, 누군가 부를 때 내 몸만 돌리지 말고 휠체어 방향도 동시에 움직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장애인은 이렇게 대하라'라는 매뉴얼로는 체득할 수 없는 기술. (······) 나는 이것을 존엄이 담긴 기술과 노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진희, 「실패를 위한 활동, 포기하지 않는 몸」, 『어쩌면 이상한 몸』, 장애여성공감, 오월의봄, 2018, 223~224쪽."
p.277
"결국 우리는 언제 ‘경이로운' 삶의 순간들에 기꺼이 뛰어들고, 언제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p.288
"나치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단학살을 당한 첫번 째 희생자는 장애인들이었다. 1940~1945년 약 20만 명의 장애인들이 나치에 의해 체계적으로 살해당했다."
p.290
"나는 장애인의 몸에 문명이니 문화니 합리성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고상한 가치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그 한계를 전복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장애인의 몸에서 억압적인 규범과 질서에 맞서는 해방적 가능성을 본다. 그렇다고 그 몸과 움직임이 항상 모든 종류의 질서나 규범에서 벗어난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장애인의 몸이란 '다른 방식으로 질서 잡힌 것이다."
p.293
"‘우리’가 이른 곳이 자칫 시스템의 바깥이 아닌 더 작은 세계, 끼리끼리 모여 나머지 세계 전부를 적으로 돌린 음습한 공동체일 수도 있다. 세상의 주된 질서에, 전통과 권위에 힘입은 안무에, 늘 존재해온 도덕과 관습과 법의 명령에, 즉 합법성에 맹목적으로 포획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주는 정당성에만 매혹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p.322
"“가슴아 불거지지 마라”라는 오래된 명령을 그저 자연스럽고 사소한 계기들을 거치면 누구나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공동체를 지배적으로 규율하는 사회적 안무의 영향을 받으며, 그 힘에서 벗어나기란 간단하지 않다. 외줄 앞에서 추락을 감수하는 결의까지 필요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안무’에 저항하고 새로운 춤을 추기 위해 우리 몸은 변해야 한다. 그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아마도 우리가 만난 구체적인 몸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깃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p.323
"김태훈과 307호에서 보낸 시간이, 천명륜이 나를 안고 뛰었던 날이, 지하철역 바닥을 기어가는 장애인들의 몸이, 손을 잡고 바닥을 굴러준 관객이 없었다면 휠체어에서 바닥에 내려와 춤을 추는 일이 가능했을 리 없다."
p.323
"무용의 역사에 장애가 있는 몸들이 진입하는 계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엄청나게 혁명적인 장애인 무용수가 실존을 건 용기 있는 도전으로 기회를 열어젖힌 것이 아니었다. 위대하고 영웅적인 천재 예술가들의 시대가 저물던 20세기 중반, 무용수들은 서로의 몸을 타고 춤추기 시작했다. 장애인 무용수들은 일상적으로 이 타기의 전문가였기에 무용계 진입의 문을 열 수 있었다. 혼자 열에 들떠 파멸로 달려가다 강 물에 빠져 죽는 예술가 대신 타인의 손을 잡고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깃들기 시작하자 어느새 무대가 열렸다."
p.332 ~ p.333
"누군가는 분명 나의 몸을, 당신의 배경을, 조건을, 정체성을 보고 비웃을 수 있다. 그 반응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상대를 공격하기' 또는 '자기를 파괴하기'일 것이다. 때로는 노골적인 응시 앞에서 속절없이 공격과 자기파괴(수치심)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을 수 있다. 더 폭넓게 현실의 여러 면모를 고려하고 존재의 더 큰 부분을 (여러) 타인과 접속한 채, 정형화되고 제한적인 선택지를 벗어날 수도 있다. 이것을 반응react과 구별하여 대응repons이라고 해보자."
p.334
"잘 산다고 좋은 삶을 살 수는 없다. 좋은 삶이라고 잘 사는 삶은 아니다. 둘은 관련되어야 한다. 잘 추는 춤과 좋은 춤의 관계도 그렇다."
p.336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 킨은 삶을 잘 살기having lived well와 좋은 삶having a good life 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자신의 도덕철학을 탐구한다. 그에 따르면 '잘 살기'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하나의 가치 있는 무엇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그 가치를 구현하는 삶이다. 마치 누군가가 삶이라는 가치의 덩어리를 우리 각자의 손에 맡겨둔 듯, 잘 사는 삶은 그 삶을 책임 있게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삶을 잘 사는지 여부는 내가 책임지지 못하는 인생의 우연한 사건들, 타고난 조건들에 좌우되지 않는다. 반면 좋은 삶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여러 요소로 채운 삶이다. 좋은 삶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수많 은 우연에 좌우될 수 있다."
p.339
"개개인을 바로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막연한 공감이 아니라 그의 탁월성에 주목하는 시선이다. 이때 탁월성은 평등의 반대말도, 성찰 없는 능력주의와도 관련이 없다. 탁월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신만이 가능한 가치를 육성하고자 책임을 다하는 사람에게 열린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선물이다."
p.339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의 춤을 볼 때, 앞서 말한 의미에서 ‘잘 추는지'만을 생각한다. 각자가 자신의 (장애라는 어려운) 조건에서, 자기 몸을 책임지고 가치 있는 무엇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최선을 다해 춤을 추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진정성 있고 책임감 있게 대한다면 우리 모두는 모든 분야에서 다 평등하게 가치 있다는 이런 접근은 평등주의적이지만 개개인의 차이를 소거할 수도 있다."
p.343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고. 기꺼이 사랑하고, 마음껏 춤추더라도 당신과 나의 삶이 파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과제만이 우리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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