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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요한 3,14-21 수치와 비참이 아니라 영광의 '들어 올려짐'(나해 사순 제4주일 레지오 훈화) 본문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4-15)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네, 다들 아시다시피 곧 일어날 십자가 사건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들어 올려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ὑψωθῶ(휩소토)라는 단어는 ‘고양되어지다’ 또는 ‘영광을 입다’는 의미입니다. 즉 십자가를 수치와 비참으로 보지 않고 영광의 자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 안에서 영광을 발견하실 수 있나요? 고통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실 수 있나요?
손가락을 다친 적이 있습니다. 다음날 있을 잔치 준비로 모두 바쁘고 피곤한 날이었는데, 다들 힘들테니 내가 아침준비라도 해야겠다 싶어 식빵을 썰다가 고기 써는 톱니에 왼쪽 손가락 끝이 조금 잘렸습니다. 순식간에 종이컵 하나 정도의 피를 받았는데도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응급실에 갔더니 이식을 해야겠다면서 입원하라고 했고, 입원한 후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손가락 끝을 일주일 동안 오전 오후 핀셋으로 긁어대는 것, 이것이 치료였습니다. 이를 악물어도 눈물이 새어 나왔습니다. 남을 돕기 위해 한 일인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낫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왜 나는 더 아파야 하는가. 정작 다친 순간보다 치료가 더 아팠습니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낫기 위해 상처를 긁어대는 고통스러운 시간은 저에게 치료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좀 더 멀리 보자면, 치유를 위한 과정이었던 거지요. 새살이 돋게 하기 위해서. 그 이후 고통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아프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이 있다는 거지요. 고통과 상실이라는 삶 안에도 치유, 새살, 생명,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열렸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시련도 더 넓은 시각,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는 ‘치유’‘구원’의 과정입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시련의 때가 오면, 고통 안에서 주님을 만나려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그 고통을 다시 바라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역시 단순히 아픔을 겪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부활도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 삶에도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죽음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 안에서 고통을 다시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점점 성주간에 가까워질수록 사순시기가 깊어집니다.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더 다가가셔서 고통 너머의 구원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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