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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삐삐 본문
아스트리드린드그렌 지음. 김영진 옮김. 시공주니어.
어린이 조카에게 줄 책으로 산 몇 권 중 하나. 책방 사장님의 추천을 받았는데 처음엔 솔직히 당황했었다^^ 마음 속에서 그리움이 확 터질 정도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흑백 드라마였던 <말괄량이 삐삐>를 보기는 했지만 다른 프로그램처럼 방영 시간을 기다려 티비 앞으로 달려가 보진 않았고 티비를 보다가 나오면 보게 되는 정도,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하지만 문득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 받아온 삐삐에 대해 내가 너무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껏 사랑 받고 읽히는 책이라면 그만한 이유는 있을테지 싶었다. 결국 조카에게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삐삐>를 읽었는데,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자꾸만 올라왔다.
불편한데 불편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찝찜한?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어 답답한? 하여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자꾸만 올라와서 언니들과도 친구들과도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동료 수녀님들과도 <삐삐>를 어떻게 기억하냐고 묻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저마다의 어린 시절을 잠시 돌아봤다.
어린 시절 늘 부모님과 함께 있어서 보이지 않는 가르침과 규율 안에서만의 자유를 누려야 했던 나로서는 삐삐의 자유로움이 부럽고 불편했다. 특히 친구들과 놀면서 친구들 말을 귀여겨 듣지 않고(어린이였던 나는 들려주고 싶은 말보다 들어야 하는 말이 많았으니까.)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맘대로 즐기는 삐삐가 어려웠다. 친구들의 염려하는 마음도 잘 몰라주는 것 같고 어울리고 대화하는 방식도 내겐 너무 거칠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릴 적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기억이 있는 누군가는 딸을 혼자 남겨두고 멀리 떠나서 신나게 살아가는 삐삐의 아빠도, 부모님 없이 혼자 남았는데도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해하는 삐삐가 불편했다고 했다. 어릴 적 가세가 기울었던 아픔을 겪은 누군가는 삐삐가 돈이 많아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라 했다. 또 어떤 이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는 <삐삐>를 보면서 어린이였던 자신을 보면서 성장했던 거였다.
휴가를 마친 후 일상을 시작하고 나서 <삐삐>를 다시 읽었다. 솔직하게, 어른인 나는 이 자유분방한 <삐삐>를 읽는 어린이들이 아무런 판단 없이 그대로 따라하면 어쩌나, 비현실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부러워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면 어쩌나 자꾸만 걱정을 했는데 또 생각해보니, <삐삐>를 보았던 어릴 적 나도 판단 없이 무작정 따라하거나 지나치게 부러워해서 내 삶에 불만을 느끼며 살진 않았다 싶었다. 어린 적 나도 지금의 나도 배워야 할 것도 많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도 아는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였음을, <삐삐>가 오랜 시간을 두고 알려줬구나 싶다. 여전히 삐삐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이렇게도 많이 있으니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