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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본문
박지리 지음. 사계절.
차이나 미에벨의 ‘이중 도시’ 같기도 하고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같기도 한 이야기. 정유정의 ‘종의 기원’도 생각났지만 이 소설은 ‘악’을 다루되 좀 다른 이야기였다. 정유정 작가가 '종의 기원'에서 다룬 악은 인간 각자가 처음부터 안고 태어나는, 시비 이전의 원죄나 본성 같은 악이 아니라 순전한 악이였다면 이 소설에서 다루는 죄는 또 다른 경로로 서로를 잇고, 죄의 어두움은 너무 짙어 때론 그 연결지점조차 가려버린다.
흥미진진하다는 말은 ‘재미’와 결부짓게 되는지라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8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소설임에도 지루할 틈이 없는 책이었다. 수시로 시점이 바뀌고 시대를 오가지만 내용이 혼란스럽기보다 오히려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내가 상정할 수 있는 경우보다 늘 한 치를 더 나아가는 소설. 소설 속 사회 구조나 각각의 배경이 사회적 고발이자 교훈인데다 인물 개인의 행위 역시 잘 닦여진 거울 같아,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과 나를 견주어가면서 책 읽는 바쁜 와중에도 참 많은 생각을 해야했다.
주인공들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책의 중반 정도를 읽을 때 알았다.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이름을 보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된 소설이라 막연히 결론 짓고 거의 반을 읽었던 것이다. 알면서도 몰랐던 것, 까맣게 잊은 것이라기 보다는 내 생각과 의지가 마치 '작정하고 지워버린 듯' 말이다. 이 역시도 이 책의 교훈이었다.
책을 덮으며 마지막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 문장은 이것이다. ‘바퀴가 아무 것도 밟지 않고 전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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