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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머튼의 평화론 본문

雜食性 人間

머튼의 평화론

하나 뿐인 마음 2016. 12. 27. 16:33

토마스 머튼 지음. 조효제 옮김. 분도출판사.


불가피한 폭력의 상황에 빠지게 되더라도 우리의 최종 지향점은 '평화'여야 하며 그 실천은 최종의 순간의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흰 수도복을 무결점 순백색으로 유지할 수 없다해서 회색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바늘 도둑처럼, 죄처럼, 일단 조금만 가지겠다는 생각은 시작하겠다는 말이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겠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불가피하다고 '여겨지는' 죄와 잘 포장된 죄는 둘 다 죄이긴 매한가지이니까.


머튼 신부는 "특히 수도자·성직자들이 현세의 일에 대해 예민하게 귀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고, 세상의 쇄신을 위해 분명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수도자가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전반적 쇄신은 위험에 처할 것이요 완전히 불모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고 호소"했다.(역자의 말)


우리(수도자)가 세상에 대해 눈 감고 귀 닫고 침묵 속에서 기도(라고 스스로 생각한 행위)에만 전념한다면, 처음엔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마치 따라가야할 모범인 줄 알고 덕을 쌓으려는 듯 앞다투어 뒤따르게 되고, 이후 그나마 가톨릭에 호의적인 타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 마저도 그렇게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스스로의 기도에만 빠진 수도자의 모습은 세상을 위하기는 커녕 심각한 해를 끼치는 것이요, 자신이 몸바쳐 사랑하고자 했던 대상인 예수마저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I have to say what I have to say!


머튼은 수도자라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예민하게 귀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고, 세상의 쇄신을 위해 수도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권위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차원을 보거나 듣는 게 수도자의 역할이 아니라, 단지 어느 누군가가 규정해 준 만큼, 또한 규정해 주었기 때문에, 기존의 견해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바로 수도자의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수도자는 전위부대가 아니라 장교가 시키는 것만을 이행하는 후방의 화물 운송 부대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맥락에서의 쇄신에 관한 한, 수도자의 역할은 단순히 높은 분들께 무조건 찬성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교회 관료들의 목적과 지향에 맞춰) 기도만 하는 길밖에 없을 겁니다. 수도회를 '발전기發電機라고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이 됩니다. 다시 말해 장상이 이미 옳은 일이라고 정해 준 것을 계속해서 정당화하기 위해 영적 '전기'電氣를 발發電는 일만 하기 위해 수도자가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도자는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나 자발성이나 창의성을 뜻하는 어떤 형태의 역할도 수행해서는 안 되게 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조심스럽게 선택해 준 것만을 보는 눈입니다. 관리자가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선택해 준 것만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수동적인] 눈이나 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머튼은 이런 상황에서 순명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


우리는, '정당한 전쟁'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또한 정당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리스도인이 자기 조국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무차별 사용하거나 전 세계적 대재앙을 불러올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태에서 제한적 핵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만일 이런 식의 정당화 논리가 의롭지 않고 비인도적이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며, 핵 사용을 노골적으로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핵무기를 무제한으로 사용하게 될 것을 가정하는 기존의 핵 정책을 폐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타산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전쟁은 맹목적 정치 세력이 만들어 낸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그러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전쟁을 향해 한 걸음씩 가까이 나아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파괴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려는 욕구와 태도에 우리가 맹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하다. 


권력투쟁에 있어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는 아니다. 하느님과 진리 그리고 모든 인류의 편을 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다.


"사랑은 선익을 위해 행하는 자비의 전쟁을 배제하지 않는다!" 중세와 십자군과 여러 종교전쟁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런 식의 새로운 행동 원칙으로부터 어떤 악한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익히 알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본성을 회의적으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상의 논리적 귀결을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그 사상의 원래 문맥에서 따지자면 '자비의 전쟁'이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떤 행동을 하건 궁극적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언제나 그의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결함은 그것이 설파하는 좋은 의도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폭력적 수단-인간의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인-을 써서 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유지할 정도로 지나치게 맹신한 데 있다고 하겠다. 그 결과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왕과 군주와 주교와 사제와 재상들이 백성들에게 사랑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내적인 좋은 의도를 잊지 말고, 무기를 들고 적들을 죽이라고 (다른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얼마나 진심으로 촉구했던가를 알고 있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묵주와 성물이 사용되었는지는 오직 주님께서만 아실 것이다!


행위의 본성상 무고한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고, 그 어떤 '순수한 동기'로도 그 행위의 사악한 본질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악행이 분명 존재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건 원칙상 오락가락하고 원칙을 회피할 구실만 찾는 양심은 그 자체로서 문제이며 치명적 결함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들 가운데 무관심과 수동적 체념 의식이 만연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일종의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교황 요한 23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평화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하신 바 있다. 또한 평화가 오류와 타협할 수는 없고 불의에 대해 양보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불의 앞에 수동적 침묵이나 잔인한 폭력 앞의 굴종이 순수한 평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유약함이나 혼돈은 장기적으로 보면 단호하거나 심지어 완고한 정책보다 더 큰 해를 끼치기 쉽다고 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계명을 어겨도 무방한 것처럼 생각되는 이런 식의 희귀하고 비정상적이며 상징적인 윤리 상황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러한 예외적 상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왜 유독 그런 희귀한 경우에만 집착하여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정의와 자비에 대해서는 잊고 사는가?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서 이제 예외적 폭력이 정상이 되었고 정상적 자비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정신적 원칙에 대한 심오하고 탄탄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깊이 있고 참을성 있는 도덕적 견결함과 인자함, 진리와 인류에 대한 애정, 하느님에의 믿음,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할 때 애매모호하고 전염성 강한 어떤 '정신 상태'가 도덕과 양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편리한 종교·윤리적 처방으로써 우리의 편견을 합리화시켜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리와 정의로부터 치명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우리는 개인주의 정신과 혼란한 마음가짐으로 인해 '모두 다 제 살 길을 찾으면 되고 나머지는 악마의 몫이다'라는 이기적인 윤리관을 가지게 되었음을 인정해야겠다. 이러한 윤리관은 안타깝게도 간혹 그리스도교 교리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교리가 아니라 풍요로운 사회의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이가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경제법칙 원리에 따라 공동선은 자동적으로 달성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한 윤리인 것이다.


공산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날이 우리가 악에 굴복하는 날이 되겠지만,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산주의적인 강압적 방식과 기준을 스스로 적용할 때에도 우리가 악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증오의 정책을 추구한다거나, 우리에게 반대한 이들의 파멸을 원한다거나, 무제한의 전면전 정책을 추구한다거나, 공포와 공황을 불러일으키는 정책을 용인한다거나, 과장된 선전전, 무조건적 항복 요구, 그리고 타국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민족주의 정책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이미 악의 영향권에 들어가 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카고 마이어 추기경의 1962년 사순시기 사목교서-


비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까지 비폭력과 사랑에 관한 복음의 윤리를 '감상적'이라고 비하하곤 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악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라고 가르치셨다는 말을 하기만 해도 엄청난 비난과 조롱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회구조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곳이면 어디에서건 사회적 행동으로써 사회구조의 완전한 쇄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양쪽 중 어느 누가 핵폭탄을 투하할 도덕적 권리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호전적인 가정을 하게 되는 맹목적이고 유독한 연막을 걷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과제는 우리 쪽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허점을 보이는 순간 상대의 공격을 받아 내가 거꾸러지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의 논리적 행동을 자극하기 위하여 여론의 압력이 반드시 한몫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개명된 양심이라면 반드시 준수할 도덕적 한계를 먼저 명백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원칙을 공표하고 그 원칙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대외적으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그런 원칙이 정책의 향방에 결정적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포와 잔혹과 편견과 증오 대신 우리는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일을 하느님이 해 주실 것으로 믿으면서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을 은인자중하는 자신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으므로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자유를 오용하여 그것을 광적이고 파괴적인 목적에만 쓴다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결과를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전쟁과 같다면 기적으로도 전쟁을 내쫓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이 지상에서 지고지순하게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불완전하고 죄인들로 가득 찬 존재임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자비는 '서로의 짐을 져 줄' 필요성, 그리고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괴롭히는 불완전성을 받아들일 필요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의 일치는 불화와의 투쟁이며, 우리의 평화는 갈등의 한복판에 존재하고 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말로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사회적 행동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현양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분명히 현양하면 할수록 더욱 유익할 것이다. 분명하고 결단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설명해 주며 언어가 결코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법과 질서가 의문시되거나 또는 심지어 완전히 잊혀진 세상에서라도 도덕적 질서와 자연법의 존재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객관적 권리가 단지 맘 편한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현실인 것처럼 여기면서, 무엇보다도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사회적·정치적 관계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양에서 내면의 기쁨만 찾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기도와 보속을 통해서뿐 아니라 정치적 결단과 사회적 책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현세와 현세의 문제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저버린 채 하느님과 관계된 일에만 온전히 자신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이비 관상적 영성은 오늘날 분명 필요치 않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심지어 그리스도교 관상가의 영성이라 할지라도, 인간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게 마련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기"(이레네우스)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연민과 책임과 헌신의 정신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고통과 불의와 오류와 허위에 무관심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라면 핵무기와 세균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비축만 해 놓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함축하는 위험성과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발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이 투표장 안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야만 하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진리를 자기희생- 오해와 불의와 비방과 심지어 투옥이나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으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순수하게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바쳐 그것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은 노동 문제든, 인종 문제든, '제3세계' 문제든, 국제 문제든 간에 모든 영역에서 정의를 위해 쉴 새 없이 투쟁해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내적 의도와 외적 행위 간의 거리를 좁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사회적 행동은 우리 내면의 깊은 종교적 원칙과 부합되어야 한다. 신앙과 정치를 더는 별개의 영역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와는 구분되는 외적 행동을 보여 주지 않으면서 '순수한 의도'의 추상적이고 잠재적인 행위에만 만족하기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다.


히틀러가 패배했다고 해서 그런 식의 움직임이 종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 세계에서도 비이성적인 세력이 표면 바로 아래 잠복해 있다. 이 세력이 민족주의 이념 또는 혁명 이념의 충동을 받아 갑자기 분출하면 현대 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 된다. ··· 그리스도교의 원칙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 민족주의가 더 높은 질서와 모든 인간을 위한 신성한 정의라는 원칙을 부인한다면, 그리고 민족주의가 민족과 민족 국가를 인간이 충성을 바칠 최종 단계로 상정한다면, 그것은 문명이 기초하고 있는 핵심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고 야만적 종족주의의 이교적 우상숭배로 회귀하는 것을 뜻하므로 인류 역사상 가장 퇴행적인 움직임이 될 것이다. -크리스토퍼 도슨-


우리는 주견이 모호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심중에 폭력과 잔혹, 그리고 가학성을 끊임없이 불어넣는 대중매체의 독약 같은 효과를 꿰뚫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무기, 미사일 그리고 또 다른 파괴의 '엔진'을 생산하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는 선진국들의 경제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위험 요소가 되고 있는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증오의 선전, 각국 정부 간의 설전이 언제나 불가피하게 폭력적 대결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증오의 정책을 주창하는 극단적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함축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우리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신주의와 마녀사냥의 적나라한 결과를 곰곰이 반추해야 한다. 우리의 일상적 결정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중요한 모든 결정을 익명의 파워 엘리트들에게 맡겨 놓는 것이 더 이상 합리적이지도 옳지도 않다. 그들은 우리가 수동적으로 잠자코 있는 동안 우리를 파멸로 이끌고 간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개탄하고 단죄하는 범죄적 경향에 대해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항의해야 할 엄중한 책임이 있다. 모호함, 주저함, 타협 등은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다. 우리는 국제분쟁을 해소할 새롭고 건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정당한 전쟁' 이론 그리고 정당한 자기 방어 권리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전쟁의 폐지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진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방어 권리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온 힘을 다해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더 높고 더 긴박한 우리 의무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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