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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할머니 수녀님의 가방 본문
어느 날 할머니 수녀님께서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붙잡아 세우시더니 가방 하나를 들고 나오시면서 "아, 이거 보여주면 또 달라고 할 거 아니가?"하셨다. "도대체 얼마나 예쁜 가방이길래 그러세요?" 대꾸하며 봤는데 정말 예쁜 가방이었다. 실은 수녀님은 곧 은퇴가 예정되어 있는 분이라(하느님 뜻은 온전히 알 수 없지만 대충 우리들 인간 계획이 그렇다는 거다.) 조금씩 짐정리를 하고 계신데 그 가방도 이제 다른 주인을 찾아줘야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가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 반 년 정도는 함께 더 살아야 하는데 싶어 "당장 주지 마시고 좋은 날 들고 다니시다가 돌아가실 때 유품으로 남기세요. 지금 주셔놓고 내내 뺏겼다 잔소리하실 거 아니예요? 대신 다른 수녀 주기 없기!"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금방 그러마 하시면서 다시 들고 들어가셨다. 헤어지기는 아직 좀 아쉬우셨나.
그런 후 며칠이 지나 동네 인근 수녀님들과 함께 나들이를 가는 날 이 가방을 가지고 나오시다가 다시 방으로 방향을 틀면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들고 나갔다가 00수녀한테 뺏기면 안되지."하시는 것.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나는 어색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얼른 "그러니까 좀 조심하셔야지요. 얼른 다시 들고 들어가시고 허름한 가방 메고 나오세요. 오늘 같은 날 꽃가방이 뭐예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절대 다른 사람한테 뺏기시면 안돼요."하며 핀잔까지 섞어가며 얼버무렸었다.
그러다가 결국 오늘 다시 가방을 들고 나오셔서 기어코 나를 주셨다. "계속 들고 있어봤자 뭐하겠노. 어차피 줄 거 정신 있을 때 줘놓고 두고두고 잔소리해야지. 안줬다간 나를 얼마나 들볶겠노."하시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시면서 말이다. 둘다 경상도 출신이라 살가운 표현은 절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은 커녕 해야할 말도 핀잔과 농담을 섞어 대충 던져버리고 만다. 게다가 진심은 알면서도 늘 모른 척. 할머니 수녀님과 나는 말도 마음도 이렇게 서로 툭툭 던지면서 힘까지 주고 받는다.
우리들 사이엔 누구 수녀님의 수도복, 누구 수녀님이 쓰시던 슬리퍼, 누구 수녀님의 가방... 이런 물건들이 소중하다.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까지 홀로 건너오셨던 00수녀님의 일복을 물려 받았던 기억. 멀리 선교 가시던 수녀님으로부터 이미 두 번이나 수선한 슬리퍼를 다시 이어 받아 신었던 기억. 십 년도 넘은 구두, 허름해진 가디건, 이젠 외출할 일도 없다며 넘겨주시던 가방, 00수녀님의 속모자, 십자가, 묵주 등. 선배님들의 물건들을 물려받아 간직하면서 우리들의 삶은 서로 한 번 더 이어지는 것이다. 몇 년 전 함께 살았던 할머니 수녀님은 당신 장례식에 나더러 시편성가를 노래해 달라고 하시면서 까만 가방 하나를 유산으로 준다고 하셨었다. 수녀님은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만날 때마다 십년 안에는 절대 나 주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게 우리만의 인사이다.
한 수도회에 속해서 살면서도 평생 한 번도 같이 살아보지 못하는 수녀들도 있다. 어쩌다 함께 만나 살다가 또 각자의 시간에 맞춰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의도하지 않아도 두세 번 만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원해도 함께 만나지지 않는 사이도 있다. 그래서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된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뜻을 통해 우리 수도삶이 깊어질 수도 있고 어둔 밤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의 시간을 대충 알고 있다. 만나는 시간은 짐작하기 어렵지만 함께 있으면서 헤어질 시간은 알게 마련이다. 지금이 이 순간도 누구는 짐을 풀고 머무르는 시간인데 누구는 마무리를 하고 떠나갈 시간이다. 떠남을 준비하시면서 나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다. 단순히 헤어지는 게 아니라 본원으로 들어가시면서 지난 수도삶을 정리하시는 수녀님이시라 마음이 더 애틋하다. 하지만 감사도 애틋함도 서운함도, 그 어떤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역시 예쁜 가방은 예쁜 저에게 더 어울리죠!" 이렇게 실없는 농담만 하고 말았다, 결국.
가방을 수도복과 함께 걸어두고는 수녀원을 오가며 한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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