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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온도 차이 본문

vita contemplativa

온도 차이

하나 뿐인 마음 2016. 7. 10. 19:50


예쁜 고양이 카드를 앞에 두고 펜을 이것저것 골라보다가 결국 편한 거 하나 골라잡고 카드를 쓰긴 썼는데, 손글씨를 쓸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여전하다. 좀 더 귀여운 글씨체로 예쁘게 써볼까 잠시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이젠 그렇게 쓰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는 몇 자 쓰지도 못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귀염 터지는 냥이 카드를 사면 뭐하노, 정작 내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인데!'라고 했더니 친구들은 오래전부터 내 글씨를 좋아했다고 말해주고 누군가는 자랑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더니 결국 어릴 적 앉은뱅이 책상 앞으로까지 나를 데려갔다. 



나도 내 글씨가 싫지 않다. 솔직히 못쓰는 글씨도 아니다. 쓴다라기 보다는 그린다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글씨를 쓰긴 하지만 나 역시 내 글씨체를 좋아한다. 이 글씨체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우리 아버지는 줄이 없는 종이 위에도 줄이 그어진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글씨를 쓰시는 분이었다. 아주 작은 글씨는 아니었지만 성인용 노트의 줄과 줄 사이에 적당한 여유를 두고 한 자 한 자 적으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글씨 쓰는 연습을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시키셨다. 칸마다 파란색 십자 점선이 그러져 있는 노트에 상하좌우 비율을 고려해가며 여섯살 적부터 글씨 연습을 했고 덕분에 난 공책 검사 때마다 늘 상을 받는 아이였고  붓글씨 한번 배우지도 않았으면서도 중학교 때까지 행사 때마다 꼬박꼬박 서예 부분에 액자를 걸었었다. 이쯤하면 또 자랑질 같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까지 내가 늘 상받는 아이는 아니었다. 바른 자세에서 바른 글씨가 나온다고 믿고 있던 아버지시라 난 바른 자세에서 늘 곤욕을 치뤘다. 성격상 줄 맞추어, 칸 맞추어 한결 같은 글씨를 쓴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데다가 축농증이 아주 심하고 키도 작았던 내겐 의자딸린 책상도 앉은뱅이 책상도 다 불편했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늘 불편했고 이 자세는 '바른 자세가 아니었으며 바른 자세에서 나오지 않는 글씨는 여전히 '조금 모자라는 글씨'였다. 아버지는 내게 바른 글씨를 쓰는 바른 사람이 되길 원하셨고, 난 연습장에 암기 과목을 적어가며 공부할 때에도 '정자체'를 써야한다는 게 답답하고 숨막힐 것 같았다. 그래서 나만 보는 노트를 가지기 시작했고 합법적?으로 나만의 글씨를 쓸 수 있는 편지쓰기를 시작했다. 예쁜 편지지엔 예쁜 글씨가 어울리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다 쓰자마자 풀로 봉해버리면 누구에게도 허락이나 검사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제일 불편했던 건 내 마음에 드는 멋있는 글씨를 쓸 수 없다는 거였다. 동글동글 예쁜 글씨도 아니고 반듯반듯 궁서체 풍의 정자도 아니고 쓱쓱 자유롭고 멋있는 글씨, 그런 글씨를 쓰고 싶었다. 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내 글씨는 조금씩 변해갔다. 자유를 느끼는 영역을 늘려가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해서 결국 지금의 글씨체에 이른 거다. 이젠 줄에 맞춘 조그맣고 반듯한 글씨는 힘들어서 못쓰겠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반은 여전히 내 마음 탓이기도 하겠지만 진짜 불가능의 영역 수준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의 글씨를 멋있다고 좋아해줬고 나 역시 마음에 편했다. 어떤 신부님이 "글씨도 남자처럼 쓰네."하셨던 것도 내겐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입회 후에 다시 생겼다. 수련소에 있는 때 특히 카드를 쓸 일이 많았는데, 어느 날 수련자 선배 자매님이 나에게 "날려 쓰지 않으면 안되겠나"하더니 급기야 "제대로 못쓰겠으면 정성이라도 들여라"는게 아닌가. 저런 말을 어찌 할 수 있나 싶기도 했지만 나의 글씨가 그렇게도 문제가 되는가 하는 고민은 어릴 적 나의 아픈 고민의 시간으로 데려가곤 했다. 바른 자세로 쓰지 못한 글씨, 예의 없는 글씨, 나만 사랑하는 것 같은 나의 글씨. 수련소 때 나의 글씨를 밉다 하진 않았어도 공동체 자매들의 '추사 김정희 글씨체'라는 의견은 공통 의견이었다. 한마디로 딱한 글씨체라는 것. 악의는 커녕 그저 생긴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글씨체 말이다. 


지금이야 글씨를 검사받거나 판단 받을 일이 없지만 여전히 난 주저한다. 웃으며 넘길 때도 많고 내 글씨가 뿌듯할 때도 많지만 자유로움이 '위반'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무리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주저할 수밖에 없다. 푸념하듯 내 글씨 이야기를 한 번씩 틀어놓아야만 마음이 놓이곤 한다. 내 글씨를 예쁘다고 괜찮다고 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좋고 고맙다. 누군가는 글씨 하나에 뭔 그리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나 싶기도 하겠지만, 내게 글씨란 그런 의미다. 아버지에 대한 변절, 길들여지지 않는 태생적 성격, 성과 속의 경계... 오늘은 어쩌다 하루 종일 글씨체 생각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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