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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슬픈 예수 본문
김근수 지음. 21세기북스.
솔직히 말하자면 무척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었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 슬픈 예수에 관한 책. 하지만 저자는 슬픈 예수를 내 생각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풀어나가면서 마르코 복음을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 창작품이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마르코 복음을 읽으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수를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책.
가진 것, 누릴 것,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사실 회개하기 쉽지 않다. 이해관계에 깊숙이 얽혀 있는 사람도 회개하기 어렵다. 남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회개하기란 더 어렵다.
먼저 스스로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옹졸한 자존심 탓에 배울 기회를 얼마나 자주 놓쳐왔는가. 선구자의 운명을 주저 없이 따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구자의 길이 옳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자기 무능과 질투심 탓에 다른 길을 걷기도 한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악에서 선으로 전환할 뿐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에서 하느님 중심주의로 바꾸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인간이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정말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가. 인간을 존중하고 책임감을 부여하는 그 모든 다양한 사상과 제도를 만들었지만 인간이 정말 그렇게 유능한가. 하느님과 연관 없이 인간은 결코 자립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사상이다. 하느님에 대한 의존이 크면 클수록 인간의 진정한 자립은 가능하다. 하느님 없는 양 내가 모든 것을 다하듯, 그러나 하느님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듯, 하느님에 대한 의존과 인간의 자립은 반비례가 아니라 정비례 관계다. 하느님께 의지할수록 나의 자립심은 더 커지고, 내가 자립할수록 하느님과 더 일치하게 된다. 부모에 대한 끈이 튼튼할수록 자녀의 자립은 탄탄해진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은 그의 말이 구구절절 맞는 말이면서도 읽는 내내 조금 불편하게 다가오는 불균형이다. 이 책에서 그토록 토로하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부자와 힘있는 자들에 대한 배제 내지 배척을 가져온다면 가톨릭(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눈에는 성직자 자체가 가진 자, 힘있는 자, 누리는 자, 억압하는 자였다. 물론 부정할 수만은 없는 사실이다. 일부 성직자들이 (혹은 수도자들이나 평신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든 그룹에는 양 극단이 존재한다. 또한 그룹의 특성 내지 자질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편만을 가지고 전체의 특성을 평가내린다면 위험하지 않은가. 부정부패한 정치인들 때문에 이 나라 정치가 다 썪었다 말할 수 없듯, 한 가정의 자녀가 탈선을 했다하여 부모의 자녀교육 자체가 엉망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나의 죄와 약함이 나의 전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성직자와 가난한 자,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는 더 작아져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더 커져야 한다. 성직자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성직자를 위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우침에서 오는 조금의 불편함을 제외하고는 구구절절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 말도 많았다. 노력하며 살고자 하지만 나는 얼마나 가난한 자의 편에 서려고 했는가. 아니, 가난한 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려고 했는가. 그 어떤 질문보다 선행되어야할 질문, 지금 나는 과연 가난한가...
신앙의 길목에는 배신이라는 달콤한 유혹이 기다린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교회 밖에 더 많지만 예수를 배신하는 사람은 정작 교회 안에 더 많다.
요즘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인문 서적들을 읽다가 느껴지는 불편한 가톨릭에 대한 오해 중 하나를 언급하고 싶다. '죽으면 다 보상받으니 현세에서는 무조건 참아라'고 예수는 말한 적 없다(특히 강신주씨 책이나 강연에서 답답함이 많았지). 예수는 불의에 저항하셨고 억눌린자들을 위해 발언하시고 행동하셨다. 불가해한 것들에 대한 마지막 보상에 대한 희망을 현실 외면으로 이해하는 이가 많다. 이것 역시 잘못 살고 있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영향 때문이기에 많이 안타깝고 '내 탓이오'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오해는 오해다. 과오로 본질을 논할 수는 없음이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에 맞서는 현실 저항의 상징이다. 하늘을 가리키며 땅을 잊는 게 아니라 하늘에 의지하여 땅을 꿰뚫는 종교다. 현실을 도피할 사람은 그리스도교에 올 필요도, 교회에 머무를 이유도 없다.
교회는 세상을 부수고 또 다른 세상(하늘나라? 하느님 왕국?)을 세워야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를 부수어야 한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5-6)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더 커져야 하고 높아져야 하며, 성직자는 더 작아지고 낮아져야 한다. '슬픈 예수'는 해방신학의 주장을 받아들여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마르코'를 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결국에는 이 말을 하고야 만다. 책을 읽으며 성직자에 대한 핀견이 느껴져서 솔직히 많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 책은 하나의 시도이며 저자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 해석의 일부일 뿐 마르코 복음에 대한 혹은 예수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아니다. 저자의 치우침이 아쉽기도 하지만 저자의 치우침의 본뜻을 알아듣는 이들의 성찰과 회개와 실천으로 이 세상의 불균형을 이루었던 저울의 기울기가 조금 더 수그러지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 이후를 예수는 거의 말한 적 없다. 예수는 땅 위의 불의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분이다.
예수는 현실에 저항하셨으며 현실을 사는 인간들을 위해 강생하셨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 모두를 위해 강생하신 예수!
마지막으로, 저자의 원의처럼 평신도 신학자들의 더 많은 연구 활동과 성과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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