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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루카 18,9-14(훈화) 본문
▥ 연중 제30주일 루카 18,9-14
아침 영어 미사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미사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복음과 독서가 무엇이었는지 도대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처음엔 영어라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눈으로 천천히 보고 읽어도 얼른 다 알아듣지 못하는데, 원어민 발음에다 원어민 속도로 들려오는 그야말로 native speaking은 정말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나가버립니다. 복음이나 강론이 기억나지 않아도 맘 편하게 영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미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있다가 깨달았지요, 영어로도 읽고 한국말로도 읽는 복음이나 본기도 역시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영어라서 못 알아듣고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 수도 있음을 말입니다. 영어와 한국말이 다를 수 있는 본기도의 경우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한국말이 더 기억이 안 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영어라는 장벽이 있긴 합니다만 신경 써서 들은 말은 영어든 한국어든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무엇이든 귀 기울인 만큼 들리나봅니다. 언어도, 사람 마음도.
이번 주 복음에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을 성경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 비교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꼿꼿이 서 있는 바리사이와 멀찍이 서 있는 세리.
혼잣말하는 바리사이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는 세리
남 얘기만, 그것도 잘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만 늘어놓는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만 고백하는 세리.
가진 것이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아서 하느님께 청할 것도 없는 바리사이와 자비(“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만을 청하는 세리.
이 둘의 기도 중에 누가 하느님의 마음에 가 닿는 기도를 드렸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기도를 모른 척 하실 리야 없지만 이 둘 중 누구의 기도에 더 귀를 기울이시게 되겠습니까. 바리사이는 필요한 것이 없으니 하느님께 귀 기울일 일도 없었을 듯합니다. 반대로 세리는 자비를 간청했으므로 기도 내내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있었을 테지요.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귀 기울이지 못하고, 그런 사람에게는 타인 역시 귀 기울이기가 어렵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우리는 이 둘 중 누구와 더 가까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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