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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9,9-13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9장

마태 9,9-13

하나 뿐인 마음 2013. 1. 13. 21:43

오늘 복음은 장소에 따라 A:9절(거리)과 B:10-13절(그의 집), 둘로 나누어 보았다. 나누어놓고 보니 B부분이 눈에 확 들어왔다.

 

A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거리를 지나가시다가, → a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 b

                                  “나를 따르시오”하시자, → c

                                   그가 일어나 따라왔다. → d

 

B :                                                        10절 → a′

                                                            11절 → b′

                                                       12-13절 → c′

                                                                        d′???

 

A

a :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을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9,1-8) 그곳을 떠나 거리 를 지나가시는 중이었다. 3년 남짓한 시간동안 예수님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 시고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셨다. “다른 데로 가까운 촌 락들을 찾아갑시다. 거기서도 복음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사실 나는 이 일을 하 러 왔습니다.”(마르 1,38)하신 예수님. 멈추시지 않고 끊임없이 당신 길을 가 셨다.

b :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셨다. 고착(固着)되어 있는 마태오. 얼마 전 바르티매오도 길가에 앉아 있었다. 일어서서 자신의 길을 걸 어가지 못하고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사람을 성서에서 얼마나 많이 발견할 수 있는가. 비단 성서뿐이 아니라 내 삶을 돌이켜보더라도 멍하니 앉아 있던 순 간들은 많았다. 자신의 고착점을 깨닫지도 못한 채 눌러 앉아버리는 일은 참 많다. 내 자신의 한계 속에서 안일하게 멈추어버리는 순간을 포함하여...

c : 예수님께서 부르신다. “나를 따르시오” 어떤 이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라 하시 고, 어떤 이에게는 당신을 따르라 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그저 가라고 말씀하 신다. 각자에게 맞는 길을 제시해 주시며 그 사람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 시는 예수님. 자기 자신의 삶(聖召)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다.

d : 부르심의 결과를 지켜보라!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다!

B

a′ : 예수님의 끊임없는 구원행위는 바로 우리-죄인-들과의 함께 하심이다. 그냥 함께도 아니고 더불어 먹고 즐기시는 것. 너도 나도 모두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이 그러하듯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 수와 제자들과 더불어 먹게 된다. 무언가 거창한 것을 갖추어야하는 것이 아 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된다. 예수님 있는 곳으로 가 면 된다. 죄많아서 성당 못간다는 사람도 많고 믿음이 약해서 성당 못간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보라!! 예수님은 그저 오는 것을 원하신다.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b′ : 바리사이들의 고착점이 보인다. 그들은 앉아 있다. 어디에? 자신들의 잣대에! 죄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보는 게 너무 어렵다. 실은 나도 종종 이럴 때 가 있다. 내 들보는 못보고 남의 티만 볼 때가 이럴 때다. 남 단도리하는데 늘 분주했던 바리사이들은 타인들을 지적함으로써(혹은 타인을 변화시킴으로 써) 자신과 온 세상이 더 의화된다고 믿었나 보다. 자신이 너무나 올바르기 에 온 세상을 더 올바르게 하려고 했고, 자기 이상의 확립을 위해 예수마저 도 과감히 물리친 그들. 바리사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자꾸만 부끄러워지 는 건... 내 고착점은 무엇인가. 내가 가끔씩? 잔소리를 하는 학사님이 있다. 걔가 이걸 들으면 박수칠 것 같다, 그만 잔소리하라면서. 다행히 내가 잘살고 있어서 하는 잔소리가 아니란 걸 알기에 그나마 마음 놓아본다. 언제가 걔에 게 하는 잔소리는 더 큰 메아리가 되어 내 안에 울려 퍼지기 때문에 그 쓴소 리가 내게도 약이 된다.

c′ : 예수님은 바리사이들도 진정 당신께로 오길 바라신다. 예수님은 성서전체를 통해 모두를 부르신다. 많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그들이 제일 잘할 수 있는 방식-배우시오-을 통해 깨달음의 길로 이끄신다. 줄줄 꿰고 있는 구약성서,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통해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서 당신께로 오기를 바라고 계신 것이다. ‘너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그런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하시며 예수님을 나 자신을 원하신다. 종종 예수님은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자신을 깨닫도록 이끄신다. 이 방식은 나와 예수님과의 비밀이긴 하지만, ‘나보다 더 날 알고 계신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라는 노 래가사처럼 정말 내게 꼭맞는 방법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d′ : 마태오는 고착점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다. 가난한 이들을 더 가난하게 했던 세리의 자리에서 벗어나 그들과 함께 하며 자신의 공간(만약 그의 집이 마태오의 집이라면)을, 음식을, 시간을 그들과 나눈다. 근데 이 뒷부분에는 d 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그건 아마도... ‘일어나 따르는 건 이제 성심 네 몫 이다’ 하시는 것일 게다. ‘마태오는 일어나 따랐다. 자, 이제 너는 어떤 결정 을 내릴테냐?’ 하신다. 당신의 몸을 주시리라 일러주신 뒤 ‘이 말씀이 모질구 나’하며 떠나가던 제자들을 향해 “그대들도 떠나가고 싶습니까?”하고 물으셨 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드렸던 말씀 “주님, 우리가 누구 에게로 떠나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 리는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있고 또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0f)를 떠올리며 내 마음을 정해본다. 내가 따르고자 하는 분은 눈멀 걸인도 당신 사람으로 부르신 분이 아니신가? 내가 앓는 이, 죄인임을 고백 할 수 있을 때 그분의 부르심을 알아차릴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의 의미를 깨달은 바리사이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내게 건네시는 예수님 말 씀을 내가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서 배우시오’라는 말이 자꾸 걸린다. 성심 대축일 복음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때문일 것이다. 다른 거 다 제쳐두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온유’와 ‘겸손’!! 이걸 못배우고 있는 성심이라는 수도자에게 예수님은 끊임없이 호소하고 계신다. 좀 배워라!! 온유와 겸손을 배워라!! 참 안타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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