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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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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부르심따라

조금씩 느려져도

하나 뿐인 마음 2025. 7. 4. 07:29

한참 지난 이야기니 이제야 일기처럼 남겨둘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이젠 웃음도 나는 일이 되었지만.
 
1.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생기긴 하겠지만 기억하고 싶을 만큼, '난생 처음'인 일을 올해 저.질.렀.다.
다름 아닌, 낯선 사람들과의 독서 모임이다.
전혀 알지 못하지만 여성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관심 정도가 아니라 선구주자들...)이었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엘리사벳 존슨 수녀님의 책(번역해주면 나만? 영어는 패스하고 한글 텍스트만 읽는다 ㅎㅎ)이어서 오래 망설일 수가 없었다.
10년 만 젊었어도 혼자 읽겠다고 고집을 피웠겠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에 더 버틸 수가 없어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그래놓고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연락을 해서 결국 첫모임을 시작한 후에 합류했다. 시작부터 어색했다.
내가 본래 I유형이긴 하지만, 모임이 좋으면서도 매번 어색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게다가 줌모임이다. 줌으로 강의를 듣는 정도가 아니라 대화를 하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줌 독서모임은 내게 설렘과 함께 좌절도 주었다. 얼마 전 줌회의에 들어갔다가 이름을 실명으로 바꾸라는데 결국 바꾸질 못했다. 모르겠다면 00로 문의를 하라는데 그것마저도 못했던 걸 생각하면... 
몇몇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생각보다 격하게 반응했다, 믿을 수 없다면서... 나도 못믿겠다.
 
2. 그리고 또 '난생 처음'인 일을 연달아 했다. 오프 모임! 
평소 모임에서는 '수녀'라는 정체성이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그래서 어색한 것도 있다. 생의 반 가까이 수녀로 살았는데, sns에서도 수녀라는 입장에서 벗어나기 힘든데, 이 모임에선 수녀가 그냥 하나의 이름 같았다. 저자가 워낙 저명하신 수녀님이라 '수녀님'이란 단어의 9할은 엘리사벳 수녀님이었고 나는 아주 드물게 '수녀'로 불렸다. 마치 희경아, 하는 것처럼 수녀님, 하고 불렸다. 수녀님의 뜻으로 쓰이면 엘리사벳 수녀님이고, 수녀님이라는 발음으로 쓰이면 나였다.
그런데 이 오프모임에서만은 나라는 사람을 고려하여 멀지 않은 곳으로 장소를 잡게 되는 바람에 도저히 빠질 수가 없었다.
모임 며칠 전까지 고민했다.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솔직히, 없지 않았다.
다들 만남을 기다리는 동안 난 한마디도 못했다...
 
3. 길을 잃었다. 점심 약속이 마침 용산에서 있었다. 거기까지 가는 것도 신부님 차를 타고 갔기에, 난 그곳이 처음이었다.
시간은 제법 많이 남아 있어서 혼자 영화도 한 편 보고 여유를 부리며 카페에서 책도 읽고 읽었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출발했는데...
비가 왔다. 너무 많이 와서 우산도 뒤집어 지고 내 가방에엔 당일 도착한 새 책도 있었다. 우산을 붙들고 가방을 지키며 폰을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금 걸어가서 폰을 확인하고 또 걸어보고... 헤매기만 했다. 서울 빌딩들은 왜 멋지기만 하고 이름은 안보이냐...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길을 물었다. 시간이 촉박해서 가르쳐준 방향으로 곧장 쉼없이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이상해서 앱을 켜니, 반대방향이었다. 
신문물에 스스로 밝다고 생각했는데, 구글맵 찾기를 실패했다. 카카오 경로찾기 마저도... 머리에 안 들어왔다.
결국 40여 분을 헤매고 나서야 쫄딱 젖어서 식당에 도착했다. 수녀가 약속에 늦다니... 내가 길을 못찾다니...
모든 게 엉망이었다. 나도 젖고 책도 젖고 겨우 도착했는데, 늦었는 데다가 모르는 사람들...
난생 처음이었다.
 
4. 대부분 2차를 가고 나는 집으로 와야 하는데 돌아오는 길이 또 낯설었다.
혼자서 여기저기 잘 찾아다니는 편인데, 몇 번의 실패를 연달아 겪고 나니 스스로 기가 죽어 있었다.
앱을 켜서 방법을 알려주는 자매님들의 친절함에도 불구하고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제발 혼자 남고 싶어...
혼자 남아야지만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가르쳐주는 길에 '난생 처음' 타보는 경의중앙선이 있었고 오늘만큼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지 않았다. 
계속 어색한 표정으로 괜찮다고만 말하는 나에게 결국 택시를 잡아주겠다는 말까지 나왔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경의중앙선을 타는 경로로 집에 가겠다고 했다. 일찍 집에 가려던 걱정 가득한 눈빛의 한 자매님이 환승까지 가는 길이 같다면서 동행하기로 했다.
고맙기도 했고 부끄러워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날만큼은,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세차게 내리던 비처럼 내 마음도 갈팡질망... 낙담, 부끄러움, 당혹,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세차게 내려 마음 깊은 곳까지 홀딱 젖었다.
젖은 옷을 벗기 위해선 안간힘을 써야하듯 자꾸만 올라오는 감정들을 가라앉히는 데에 무지 애를 썼지만 안간힘도 한참 부족했다. 
이건 내가 아닌데, 정말 아닌데...
 
5. 한강역에 무사히 내렸다. 습도가 너무 높아 너무 덥고 눈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 익숙한 길로 가야지 싶어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내어 걷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바오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3달 가까이 매일 찾아가 기도했다. 중환자실에 계실 때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문을 쳐다보며 혼자 기도했다.
며칠 전 급격히 안좋아지셔서 임종방으로 옮기셨고, 전날에도 임종예식을 한 터였다. 마음이 급했다.
'난생 처음' 가 본 한남역은 내겐 낯설지 몰라도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다. 
난 길을 잃지 않고(헤맬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 얼른 내려놓고) 가장 빠른 길로 병원을 찾아갔다.
이것만큼은 헤매지 않았고, 원목실에서 척척 물건들을 챙겨 빈소에 가져다 드리고, 절차를 잘 설명해 드리고 기도까지 하고 집에 왔다.
그래, 이것만 잘 하면 되는 거지.
 
6. 조금씩 늦어지고 있다.
기계를 잘 다루던 내가 키오스크 앞에서 헤매기도 하고,
혼자서도 길을 잘 찾고 초행길 운전도 두렵지 않던 내가, 앱을 보면서도 길을 잃었다.
가르쳐주는 일에 익숙했던 내가 알려주는 말에도 압도 당한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앞에서 당혹감이나 낙담을 제쳐둘 줄 안다는 데에 안도하며 감사한다.
아직까지는...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느려지고 점점 낯설어지겠지만 남은 감각과 총명(???)은 잘 모아서 가장 중요한 일에 써야겠다.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일들은 조금씩 가지치기를 하며
꼭 피워야 할 꽃을 키우고 필요한 열매만 실하게 맺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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