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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그리스도교의 오후 본문

雜食性 人間

그리스도교의 오후

하나 뿐인 마음 2025. 4. 22. 17:09

 

토마시 할리크 지음. 차윤석 옮김. 분도출판사.

 

사순절 봉재책이었는데, 깊이 동의하지만 다소 무거운 주제였고 내용 역시 쉽지 않아서 밑줄 그어가며(너무 많이 그었다...), 이해 안 되면 되돌아가서 다시 읽어내려가느라 성주간까지 읽었다. 정리마저도 솔직히 힘들다. 그러나 이 신부님 책은 진짜다, 진짜.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이천 년의 역사를 지닌 그리스도교가 현 시점에서 다시 '그리스도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지를 말한다. 많은 부분 동의했고, 특히 넌스에 관한 진단이 마음에 많이 남는다. 예전 어느 본당에서 일할 때, 성당에서 주요? 자리를 차지하며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안에서 도저히 신앙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느님을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외면 당하던 상황에 많이 도전 받았고 무력감도 느꼈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경쟁자는 세속적 인본주의와 무신론이 아니라 교회에서 벗어난 종교심이다."는 신부님의 말이 너무 공감이 가고, 참 아팠다. 

 

"나는 '작은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박해를 받는 이들' 안에서, 그리고 동시에 내가 허락받은 경청과 위로와 화해의 직무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꼈다." 책을 반틈 넘게 읽었는데도 좀처럼 미래가 맑지 않아서 좀 혼란스럽기도 하고 막막하고 갑갑하기도 했는데, 마지막에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보았다. 지금 내가 맘먹고 나선 이 길이 잘못된 길이 아니겠구나 싶은 응원을 받았다고나 할까.


p.15 ~ p.16
"그리스도인은 서로 분열되어 있으며, 특히 오늘날 서로의 차이는 교회들 간에 있지 않고, 교회 내부에서 나타난다. 세계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호전적 무신론이나, 신앙을 북돋고 움직일 가혹한 박해를 마주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무관심에 직면해 있다."

p.17
"이 책은 변화하는 세계에서 하느님을 찾는 여정으로서의 신앙에 관한 책이다. 삶으로 구현된 신앙과 신앙 행위,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fides quae), 곧 '신앙의 대상에 관해서라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믿는지(fides qua)에 관한 책이다. 신앙이란 단순히 '종교적 확신'이나 관점이 아니라, 어떤 삶의 태도, 지향,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그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조들(beliefs)보다 신앙(faith)에 관심이 있다."

p.18 ~ p.19
"그리스도 신앙은 일차적으로 예수라는 어떤 인물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는 길,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 당신 자신을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이루게 될 거라고 약속하신 그분과 함께하는 길을 의미한다."

p.19
"바오로가 이해한 그리스도교는 그 이전에 극복할 수 없었던 종교와 문화 간의 경계를 뛰 어넘고(유대인인지, 그리스인, 곧 이방인인지 무관함), 사회계층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자유인인지, 로마 세계에서 권리 없는 '말하는 사물'인 노예인지 중요하지 않음), 명확히 정의된 젠더 역할(남성인지 여성인지)을 초월한다."

p.20
"하느님이 그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가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는지, 그의 내적 세계와 그의 관계에서 그의 신앙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살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자기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의 신앙이 그가 사는 세상까지 얼마나, 또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p.21
"신앙의 실존적 요소, 다시 말해 삶의 실천으로 구현되는 신앙 행위는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의 ‘내용’과 인지적 측면보다 더 중요하다."

p.29
"하느님은 종교적 관념, 소망, 환상의 세계의 요소가 되어선 안 된다."

p.36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기준을 찾고자 한다면, 인간이 자기 말로 고백하는 것에서 찾지 말고, 신앙이 자기 존재, 자기 마음에 파고들어서 변화시킨 정도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 자연, 사람, 삶, 죽음과 생생한 관계에서 신앙이 드러나는 방식에서 그 기준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 는지로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연에 대하여 어떤 관계인지로 자기 신앙을 고백한다. 인간은 다른 이들을 자기 형제자 매로 받아들임으로써 공통의 아버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자기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고백 한다."

p.39 ~ p.40
"나는 위기들을 기회의 시간, 무르익은 순간인 카이로스kairos라고 생각한다. 그리스어에는 시간과 관계된 다른 두 관점을 나타내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크로노스chronos는 양적인 시간으로서 시, 일, 년의 순서, 즉 우리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 가능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회, 무언가를 위한 때, 무르익은 때, 엄습의 순간이다. 한 번뿐이며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순간의 도래이자 출현이기에,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며 그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결정의 때, 지체하거나 허비해서 는 안 되는 결정적 순간이다."

p.46 ~ p.47
"성경의 하느님은 주로 일회성 역사적 사건들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사건들에 관해 서술하고 해석하는 이야기들 안에서 드러내신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역사에서 나타나시고, 사건들에서 당신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듣도록 하시며, 사화와 이야기들에서 당신 말씀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전달하도록 하신다. 역사를 해석하고, 사건들에서 경험을 쌓고, 경험의 전달과 전승에서 문화를 만드는 이야기들 속에서 역사는 비로소 인간의 역사가 된다. 해석할 이야기들이 없다면 그 역사는 말이 없는 것과 같다."

p.47
"성경의 하느님은 '역사의 이면'에 계시지 않는다. 즉 무대 뒤에서 인간을 꼭두각시 인형을 움직이는 것처럼 다루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창조주는 창조의 결과물, 자연, 역사에 현존해 계시면서 역사의 몸통에 결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화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문화에서도 현존해 계신다."

p.52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문화 속에 현존하신다. 하지만 문화, 특히 현대 예술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때 우리 세계에서 하느님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반대되는(sub contrario) 표징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부조리 연극뿐 아니라 주로 그리스도고 근본주의자와 청교도를 자극하고 불쾌함을 일으키는 많은 불경스러운 동시대 예술 작품들은 신학적으로 신중하게 해석해야 할 가치가 있다. 신의 부재, 세상의 불가해함, 인간 운명의 비극에 대한 체험이 어느 순간에 바로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을 목마르게 갈망하는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p.58 ~ p.59
"이기주의는 우리 의식적 삶의 중심인 에고Ego에서 좀 더 심층의 중심인 내면의 나('자기‘Selbst)로 가는 길에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작은 나'에서 가장 고유하고 본질적인 것(이것을 하느님 또는 ‘우리 안의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다)으로 전환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를 충족시키고 성숙함과 충만함을 얻는다. 융에게 충만함이란 결함이 없는 자유가 아니라 온전성(Ganzheit)을 의미한다. (많은 언어에서 '온전한, 전부'와 '거룩한, 성스러운'을 뜻하는 단어 또는 '건전한’과 ‘거룩한, 성스러운'을 뜻하는 단어가 서로 관련이 있다. 독일어의 ganz와 heilig, 영어의 whole과 holy가 그렇다.)"

p.58
"무르익은 시기, 성숙한 나이인 인생의 오후에는 인생의 오전과는 다른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영혼의 여로,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인생의 오후는 카이로스, 즉 정신적 • 영성적 삶이 펼쳐져 나갈 적기이며, 평생에 걸친 성숙의 과정을 완성할 기회이다."

p.58
"정오의 위기 시험을 통과한 사람만이 인생의 오후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예컨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받아들여서 통합할 능력을 갖춘 사람만 비로소 떠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삶의 새로운 단계를 그저 오전 활동을 계속하는 것으로 허비할 수 있다."

p.74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예수의 다른 첫 제자들이 고수했던 선교관에서 해방됨으로써, '새로운 생활양식'으로서의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신생 그리스도교가 법체계의 형태를 띠지 않도록 방지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법체계 형태를 띤 종교는 유대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나중에 이슬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율법주의의 유혹은 교회사 전체에 스며 들어 있다. 그래서 루터에서 본회퍼에 이르기까지 개혁의 위대한 인물들은 항상 바오로처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호소했다."

p.84
"종교를 이제 여러 세계관 중 하나로만 여긴다. 종교 외에도, 지금 사회에는 저마다 독자적 규칙을 따르기를 원하는 다른 많은 생활 영역이 존재한다. 모든 이가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종교가 모든 곳에 존재하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고 자명한 것이기를 그만두었고, 사람들이 종교와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종교는 연구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 신학은 '신의 학문'으로 이해되었지만, 계몽주의 이후 신학은 신앙의 해석학이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에 관한 학문'으로 옮겨 가고 있다."

p.85
"근대에 그리스도교는 현대 세속적인 시대가 '종교'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띤다. 많은 그리스도인조차 그리스도교를 주로 '내세'에 관심을 두지만 현세에서는 주로 도덕에 관심을 두는 일종의 세계관으로 인식했다."

p.89 ~ p.90
"디트리히 본회퍼는 종교가 주로 전능하고 강력한 하느님이란 표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표상 때문에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의 참된 얼굴이 가려지고 왜곡된다. 그분의 얼굴은 오히려 무력하신 하느님' 안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자기 봉헌 속에서 나타난다. 어른이라면, 과학적 가설로 입증한 신 없이 헤쳐 나가야 한다. 이성적인 인식의 빛 앞에서 '신비스러운' 동굴로 피신처를 찾는 그런 신 없이 말이다. 어른이 된 그리스도인은 종교적 형이상학적 • 유사과학적 설명들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세상에서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etsi Deus non daretur) 살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 입문의 전제 조건으로서 할례를 거부한 것처럼, '종교적 선입견들'을 버려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가부장적 표상이 없어야만 하느님 앞에, 하느님과 함께 정직하고 책임감 있게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다."

p.99
"교회 활동이 성사 집행에만 국한되고, 종교심이 인격적 신앙으로 변혁되지 않는 곳에서 그리스도교는 그저 사회적 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시들고 사라지는 ‘문화적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만다."

 

p.103 ~ p.104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성적 학대의 책임을 이른바 1960년대 성 혁명의 결과로 성직자들의 도덕이 해이해진 탓이라고 여겼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담하게 이런 현상들의 뿌리 깊은 원인이 성직주의, 승리주의, 교회에서 권력과 권위를 다루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사실, 학대 사례는 1960년대 훨씬 이전부터 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교회가 세속 권력을 빼앗긴 후, 일부 성직자들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권력과 권위를 행사하고 남용함으로써 이런 손실을 만회하려 했다. 특히 가톨릭교회에서 지금까지도 온전하게 평등권을 누리지 못한 위치에 있는 무방비의 사람들, 아이들, 여성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p.105
"예수님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였다. 사제의 의례적인 종교와 그것을 비판하는 예언자적 비판가들 사이에 긴장이 있을 때, 그는 예언자들 편에 섰다. 성전 파괴와 사제의 성전 종교에 대한 그의 예언자적 말씀은 그의 생명을 요구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벗을 이스라엘의 성전 종교라는 의미의 사제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당신을 본받아 '모든 이들 중 가장 하찮은 종'이 되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성직 계급', 즉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지배 계급의 의미에서 '신성 정부‘를 세우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권력 세계와 종교적 • 정치적 조작에 도발적으로 맞서는 이들이 되라고 권한을 부여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빵을 나누어 주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 자기 부정, 자기 증여를 따라 실천할 사명을 맡겼다."

p.106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sacerdos alter Christus)라는 라틴어 문구는 여러 교황이 언급했고, 교황문서에도 나타나 있으며, 사제의 첫 미사 강론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위험한 문구이다. 엄청난 오해를 일으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제2의 그리스도, 또 다른 그리스도는 없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시며,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재자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대리인이며,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의 대리인이다. 예수님은 '제2의 하느님'이 아니며, 사제는 그를 대체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제는 그리스도 대체인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즉 스스로를 내어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가톨릭교회는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의 보편 사제직과 교회에서 봉사하도록 서품받은 직무 사제직을 구분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현존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재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인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찬적이다."

p.106 ~ p.107
"사제는 숭배를 받는 아이돌이 되어선 안 된다. 성직주의와 싸움은 건전한 방식의 우상 파괴이다. 교회에서 사제로 불리는 이들은 직무 사제직이란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가진 사람들로 예수님의 계명을 이행하고, 모든 이들의 가장 하찮은 종이 되라는 사명이 있다. (앞서 언급한 보편 사제직은 세례라는 지워지지 않는 인호에 기초한다.) 이것이 사제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도적 계승’의 특징이다."

p.107
"현재 교회 형태가 맞이한 위기는 단지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교회가 선포하는 내용 및 형식과 신자들의 생각과 견해 사이의 괴리가 갈수록 커지는 것이다. 찰스 테일러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수천 년 동안 전례에서 같은 기도문을 수없이 반복하지만(예를 들어 신앙고백을 읊을때), 저마다 그 의미를 다르게 이해한다. 심지어 많은 이들은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p.139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경쟁자는 세속적 인본주의와 무신론이 아니라 교회에서 벗어난 종교심이다."

p.140
"오늘날 세계에서 우리는 세 가지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종교가 정치적 정체성 이데올로기로 변하는 현상, 둘째, 종교가 영성으로 변하는 현상, 셋째, 자신이 '조직화된 종교'에 속하거나 무신론자라고 밝히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는 현상이다."

p.145
"외부적 신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종교는 다른 목적(예를 들어 사회적 인정이나 집단 정체성, 또는 특정 집단의 소속감을 확인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이며, 종종 매우 완고하고 권위적이다. 내면적 신심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며 유연하고 사교적이며 감수성이 있고 희생적이며 연대감을 가진다."

p.147
"길로서의 신앙과 확실함으로서의 신앙 사이, 순례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터전으로서의 교회 사이, 기억과 서술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 사이에 대화가 필요하다. 미래의 교회가 이러한 다양한 양상과 형태를 지닌 종교심의 공동 터전이 될 수 있을까?"

p.147
"그리스도교의 많은 제도적 형태가 위기를 겪고 새로운 형태들을 찾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제도적 형태의 신앙을 그저 과거의 유물로만 여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오늘날 종교 기관들에서 그리스도교 보수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이 대부분 주도권을 잡았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의 전형적인 약점이다."

p.150
"교회와 결별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보통 무신론자가 되지는 않는다. 교적을 버린 뒤 무신론자가 된 사람들은 이미 무신론자였고, 교회와의 관계가 믿지 않고 소속된, 즉 내적 확신 없이 형식상 교회에 소속된 범주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 교회를 떠나는 사람 중 많은 이가 신앙과 복음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동기는 교회가 본래의 소명에서 멀어졌다는 확신에 있다."

p.158
"루마니아와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와 달리 중부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폭력 없이 혁명이 일어난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경찰국가 체제에서 자유 사회로 터무니없이 손쉽게 이행하는 대가로 과거를 정리할 중요한 정치적 • 심리적 • 도덕적 과제를 포기했다. 새로운 시대의 문턱이 폭력과 복수심으로 얼룩지지 않았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거를 정리할 준비 부족은 자비와 용서의 미덕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부작위의 죄, 진리와 정의에 반하는 죄를 지은 것이다."

p.158 ~ p.159
"사회가 악에 노출되었고 도덕적으로 붕괴했는데, 악에 대해 충분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심지어 적절한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다면 그 악은 극복될 수 없다."

p.159
"탈공산주의 사회들에서 과거를 정리하는 분야에서 교회도 실패했다. 교회는 '용서의 전문가'로서 용서와 화해가 잘못을 단지 망각과 무시의 어둠으로 밀어 넣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큰 비용이 드는 과정임을 보여 줘야 했다. 한 번이라도 먼저 자기 선에서 부역했던 문제를 따져 보려는, 즉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 보려는' 용기를 내지 못한 교회는 차츰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치유되지 않은 사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헌신할 도덕적 권리를 상실했다."

p.166
"전세계 사람들이 같은 제품과 기술 발명품을 사용하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컴퓨터 게임을 하며, 같은 화폐를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인류가 한 가족이 되지는 않는다. 인류 화합이나 그리스도인 일치의 과정은 단일화나 표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인정과 보완, 시야의 확장, 일방성 극복을 목적으로 한다."

p.167
"특히 우리 시대에서 의심마저 끌어안는 신앙과 비판적 사고, 근원적 믿음과 끊임없는 탐구의 변증법을 식별한다면, 겸손한 자기 성찰의 여지가 생기고 이로써 문화와 종교 사이의 더 깊은 상호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더욱 심원한 세상을 위한 시간, 그리스도교의 자기 초월의 때가 왔다는 것이다."

p.182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 인간 의 모든 상상, 즉 형이상학적 구조에서 개인적 환상에 이르기까지 생각들을 근본적으로 '망각'하고 '배제'할 용기를 전제로 삼아야만 한 다.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 자신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단어로 의미하고, 의미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인정해야 (또는 현명하게 인식해야) 하며, 예수님이 당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 와 맺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길 갈망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보호자요 조력자인 분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다."

p.182
"우리는 이 확신을 결코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과 이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인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서로 스며드는 하나의 덕이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개방성(계시)이 인간의 개방성, 즉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능력과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형이상학자들의 신 관념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가 맺는 관계이다."

p.183
"그분은 우리가 신의가 없을 때도 신의가 있으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믿지 않아도 우리를 믿으신다. 그분은 우리 마음, 믿음과 불신, 신의와 배신이 늘 씨름하는 인간의 마음보다 더 크시다."

p.186
"우리 세상에서 온갖 불행, 고뇌, 고통의 상처를 외면하는 사람은, 그 상처에 눈을 감고 만져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외칠 권리가 없다."

p.186
"우리는 교의적 정의에서 벗어나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고통에 담긴 신현神顯, 하느님의 계시에 개방적인 정통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 세상의 상처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방식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비를 접촉할 수 있다."

p.188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분은 문이고, 열린 문은 텅 빈 공간이다. 따라서 통로가 되어서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케노시스, 자기 증여, 자기 비움이 하느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드높이시고' 그분에게 '모든 이름 위의 이름'을 준 근거이다. 즉,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편적인 그리스도'로,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전능한 주님으로 만드셨다."

p.195
"그리스도는 어떤 '교리'를 제공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 및 타인과의 관계, 사회 및 자연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등 우리의 모든 관계를 포함한 인간의 실존 방식과 우리 인간성을 부단히 변화시킬 방법을 알려 주시러 오셨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무엇의 교의, 이론, 교리가 아니라 '무엇을' 배우는 과정이나 익히는 과정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고 치유 방식이다.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은 권위 있는 가르침'이며, 이 권위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의 동기와 목표, 삶의 근본적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예수님은 랍비, 철학자, 단순히 '도덕 스승'이라기보다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삶의 스승(Lebemeister)이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신앙을 배우고, 회심에 대한 요구에 실존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활 사건의 요소이다."

p.196
"죽음, 죄, 두려움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역사에서, 교회의 신앙에서, 개개인의 인생사에서 계속된다. 부활하신 분의 숨겨진 삶(예수님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은 개인의 회심이나 교회 개혁의 사건들 속에서 수면으로 샘솟는 지하수와 같다."

p.200 ~ p.201
"‘그리스도 안에 잠기는’ 사건인 세례의 신비는 성사를 거행하는 순간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 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은총)이 세례받는 사람의 존재 전체와 인격 전체로 흘러 들어가서, 그 사람 안의 황폐 하고 공허한 것에 지속해서 물을 대 주며, 평생 죄와 불신의 돌덩어리를 침식한다. 또 그의 의식과 무의식의 더욱 깊은 층으로 파고들어가 그의 생각, 감정, 행동, 양심의 지성소까지 침투한다. 세례의 은총은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이며, 약속된 창조주 성령(Creator Spirtus), 위로자(Parakletos)의 에너지이다. 그리고 그 은총으로 평생 메타노이아의 움직임, 즉 변화가 일어난다. 세례는 지울 수 없는 인호 (signum indelible)이기에, 세례받는 사람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이 은총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선물받은 사람이 선물의 가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선물의 성질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p.201
"가톨릭교회는 인간 안에서 성령의 활동이 성 사에만 매여 있지 않으며(하느님은 성사에 매이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의 경계로 제한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교회가 자신을 법적으로 편협하게 이해하지 않고 자유의 은총과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경탄할 때, 앞서 우리가 언급한 세 가지 차원에서 교회일치운동의 발전에 대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p.203 ~ p.204
"하느님 사랑은 모든 것을 포함한 무한한 사랑이다. 하느님은 '대상'이 아니고(따라서 하느님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물에 현존하시는 동시에 만물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하느님 사랑은 세상의 지평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와 원하는 대로 맺는 어떤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감싸고 존재하게 하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닮는 것, 곧 사랑을 통해 사랑으로서 만물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p.204
"따라서 신앙의 은총은 어떤 구체적인 사람의 삶에서 일차적으로 그 사람이 신앙의 교리에 이성적으로 동의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많은 이들이 회심을 떠올리듯이 '하느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초월(자기 초월, 이기주의와 자기도취의 초월)이 있을 때, 즉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있을 때 그 은총을 받는다."

p.208 ~ p.209
"따라서 신앙에서 하느님을 쉼 없이 찾기 위해서는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는 인간이 자기 뜻을 이루고자 하느님께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숨겨진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그분의 의지를 이해하려는 내적 침묵이 낳는 수단이다. 신앙은 천국에 있는 성인들이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지복직관 visio beatifica)과 달리 완전하고 명백한 앎의 증거나 확실성이 없다. 만약 신앙이 인간적으로 진실하다면, 신앙이 성장하고 하느님 편에 (하느님 은총의 선물로서 신앙과 함께) 더 강렬하게 협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판적 질문을 위한 공간을 남겨둘 것이다. 신앙과 함께 따라다니며 신앙을 겸손하게 만드는 건전한 의심이란, 하느님에 대한 의심이나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신앙인이 자기에게 건네신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한 의심이다."

p.210
"사랑은 오직 자기 삶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자기 삶에 의해 입증되지 않은 말로 사랑에 대 하여 말한다면, 그건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근거 없이, 즉 터무니없이 내뱉는 것과 같다."

p.210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신뢰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그분의 그 믿음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견해가 아니라 하느님의 신뢰에 대해 우리가 신뢰하는 응답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사랑으로 하는 응답이다. 이로써 믿음은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우리는 이 믿음과 사랑을 소유가 아닌 희망과 열망의 형태로 가질 뿐이다."

p.211
"우리 믿음에는 부수적인 것, 우리 상념과 희망 등이 닥지닥지 매달려 있다. 필요 없는 짐을 전부 내려놓은 믿음만이 '하느님의 믿음'이다. 사람 눈에는 위대한 것이 하느님의 눈에는 반대로 사소하다는 것을 우리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 알고 있다."

p.216 ~ p.217
"요한의 서간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다"란 표현을 본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에 대해 우리의 이성이 알고 있는 것보다 크며, 우리의 종교적 확신, 우리의 의식적이고 성찰적인 믿음의 행동, 우리 고백보다 더 크다."

 

p.230
"현대 문명에서 삶의 경제화는 글로벌 상품 및 아이디어 시장이 '영성'에 대한 수요에 재빠르게 동양 영성의 저속한 모방, 저급한 밀의종교, 은비학隱祕學, 부적 등을 제공하거나, 빠른 깨달음, 치유, 황홀한 행복 체험, 마법의 힘을 약속하는 사기꾼의 처방과 같은 저렴한 상품을 대량 공급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이비 신비주의는 모든 종류의 약물 시장과 오락 산업의 요소가 되었다. 자칭 ‘영적 스승'이라는 도사, 구루들은 자기 본거지에서, 속기 쉬운 사람들을 종종 정신적으로 조종하고 심리적으로 학대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했다. 그곳에서는 성적 학대도 성행했다."

p.238 ~ p.239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매우 쉽게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한다. 보통 그들의 무신론은 명확하게 특징지어진 관점이나 충분히 생각한 태도를 표현한다기보다 다수의 일치된 정신상태를 표현한 것에 가깝다. 여기서 "나는 무신론자다"라는 문장은 주로 나는 평범하고, 미지의 사회에 속하는 구성원이 아니며, 내 주변의 다른 모든 사람과 같다는 의미이다. 또 나는 종교에 전혀 반대하지 않지만, 종교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것'이고, 나와 개인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p.244
"하느님의 응답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우리가 찾고 바라며 '주문하는' 개별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 하느님의 응답은 전체 실재이며, 우리의 삶 전체다. 하느님은 '만물 속에 계신 하느님'이시며, 끊임없이 그분을 찾고,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분께 다가가서, 전체로서 그분을 발견하고, 매번 다시 온 세상을 망라하고 동시에 초월하는 전체로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p.244
"내게는 응답이 있는 기도보다 응답이 없는 기도가 신앙의 학교이다. 하느님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자판기가 아니며, 그분의 실재가 우리 생각 대로 ‘작동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경험 때문이다. 다른 유대인 일화에서 랍비는 어떤 여인의 불평을 듣는다. 오랜 세월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느님이 응답하시지 않았다는 거였다. 하지만 랍비는 그녀에게 하느님이 응답하셨다고 했다. "안 돼!" 가 그분의 응답이었다고."

p.248
"한편으로 의식적이고 말로 표현되고 감정적으로 체험된 종교심과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 안에 잠들어 있는 완전히 다른 악마적인 것 사이의 모순이 종교적 광신도의 사례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게다가 무신론적 광신도의 사례에서도 비슷한 모순을 볼 수 있다). 광신도는 자신이 주장한 믿음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인 경우가 드물다. 광신도는 종종 무의식적이고 인정하지 않아서 통제하기 힘든 강한 의심과 그들이 선포하는 내용에 대한 불신으로 괴로워한다. 그들은 자기 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함으로써 자기 의심을 없애려고 하며, 거기서 진짜 또는 가상의 적, 이단자, 의심하는 이들을 주로 도덕적 육체적 숙청의 방법으로 침묵시키려고 한다. 융이 추천한 방법 으로 광신주의에서 우리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데, 겉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꽤 까다로운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정 하지 못하는 모습, 우리 그림자, 또 다른 우리 얼굴을 보여 줄 수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우리와 싸우는 이들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극 단주의 태도에는 종종 본능적으로 보상을 갈망하는 무의식적인 또 다른 극단성이 숨겨져 있다."

p.253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을 정의한 개념을 반복하겠다.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존재하길 원한다(volo ut sis)는 뜻이다. 하느님의 존재와 본성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하느님이 계시길 원하는지 아닌지, 이것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인지를 물어볼 수 있다."

p.267
"교회가 이미 초창기부터 예수님의 성경인 히브리 성경을 구속력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기로 정했을 때, 그 결정은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이 교회의 고유한 역사적 기억의 구성 요소라고 선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기억, 히브리 성경은 교회의 기억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다룬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교회가 홀로코스트 비극을 포함한 유대인 전체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p.269
"과정 신학의 관점에서 본 역동적 하느님 개념은 교회를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교회의 제도적 형태뿐 아니라 신학적 지식도 역사 속에서 발전한다. 교회는 역사 내내 여정에 있었지, 목적지에 도달한 적이 없다. 교회 역사의 목적은 종말론적이다. 기다리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인 '어린양의 결혼식'은 역사적 시간의 지평 너머에서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신학이, 우리 신앙에 대한 한결같은 성찰이 개방적이고 순례적인 성격을 잃는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 그릇된 의식이 될 것이다."

p.270
"교회사는 성숙의 과정이지만, 더 높고 나은 것으로 가는 일방통행의 진보가 아니다. 그 역사에는 다양성과 일치가, 조화가 불화와 함께, 죄와 거룩함이, 편협하고 문화적으로 제한된 '가톨릭주의'와 가톨릭 보편성이, 이단과 배교의 미로와 사도 전승에 대한 충실함이 같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기도와 노동으로 세상과 우리 마음, 우리 역사, 우리 관계를 하느님 나라의 빛에, 하느님 뜻의 궁극적인 승리에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사는 천국이 아니며, 역사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을 찾는 역사의 여행에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닌' 사이의 영원한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겪은 20세기 역사의 경험에서 지상 천국을 약속했던 이데올로기들이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p.271
"종말론적 차이를 주의하지 않고 지상의 교회를 승리의 나팔을 울리는 천상의 교회와 혼동하게 되면 승리주의가 생긴다. 지상의 싸우는 교회는 특히 승리주의의 유혹을 포함해 자기 경험, 나약함, 죄와 싸워야 한다. 만약 승리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호전적인 종교 기관이 되어 버리면, 남들,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편에서 성가신 사람들과도 싸운다. 자만심과 맹목으로 범벅이 된 승리 주의는 교회의 병폐이다. 이런 승리주의를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이라고 불렀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주의라고 불렀다."

p.272
"우리는 먼저 직접 묵상하고 내적으로 소화하고 음미한 것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 (지혜를 나타내는 라틴어 표현인 '사피엔시아'sapiencia가 ‘맛이 있다’, ‘맛보다'라는 뜻도 가진 동사 '사페레'sapere에서 유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p.275
"교회가 세계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지지 않고, 사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은 채 그저 '명확하게 종교적인 활동'에만 전념한다면, 교회의 활동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 활동적인 삶(vita activa)과 관상적인 삶(vita contemplativa)은 함께 속해 있다. 칼케돈공의회의 그리스도교 교의의 표현 수단을 빌리자면, 그 둘은 서로 뒤섞이지 않은 채 분리되지 않고 서로에게 속해 있다. 하나를 다른 것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둘 다 훼손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사회의 정신적 • 도덕적 병폐의 예방, 사회적 면역 체계 강 화, 인격과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적합한 환경 조성인 통합적 생태학에 관한 것이다. 이 분야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의 많은 기구와 운 동 단체와 협력해야 할 뿐, 세상을 치유하는 데 독점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

p.280
"교회는 영성적인 오아시스와 이를 보살피는 데 자기 삶을 헌신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비록 사회의 문화가 다양하고, 급진적 영성의 가파른 수직선보다 삶의 수평선을 표현하고 반영한다 하더라도, 사회와 그 문화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킬 수 없고 또 고립되어선 안 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봉사는 필요하다. 교회 전체는 사회에서 반문화의 섬을 만들 수 없고 만들어서도 안 된다."

p.283
"그리스도교의 자기 초월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교회가 가시적인 경계를 넘어서 모든 이를 섬기고자 한다면, 교회가 향한 이들의 다름과 자유를 존중하며 봉사를 해야 한다. 모든 이를 자기 진영에 밀어 넣고 그들을 통제하며 식민화'하려는 의도를 떨쳐 버려야 한다. 성령이 교회의 가시적인 경계 너머에서도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권능을 신뢰하여야 한다."

p.284
"교회는 병원처럼 사회의 건강을 보살피고, 사회 전체를 덮치는 질병의 예방, 진단 및 이후의 치료와 재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사회 시스템 내부의 '사회적 죄'와 일탈적 구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수십 년간 죄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해 왔다. 우리 모두 점점 더 파악하기 힘든 경제적 • 정치적 관계의 그물망에 얽혀 들어가고 있으며, 거기서 악은 자주 초개인적, 익명의 형식을 띤다."

p.286
"나는 '작은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 박해를 받는 이들' 안에서, 그리고 동시에 내가 허락받은 경청과 위로와 화해의 직무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꼈다."

p.286
"만일 신토마스주의의 도덕 교과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마 나도 비슷하게 단순한 흑백논리나 비인간적인 판단으로 그 사람들의 문제에 접근할 것이다. 또 성체성사가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라 여행자들을 위한 빵(panis viatorum), 즉 성숙의 여정을 위한 빵이며, 약자와 실패한 이들을 위한 양식이자 치료제임을 상기시키는 교황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p.291
"영적 직무는 영적인 분야가 인간학적 상수이며, 본질상 인간에 속하고 인간성을 같이 형성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영적인 것은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삶의 의미'뿐 아니라 특정한 상황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모든 기쁨과 슬픔이 함께한 자기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겪으며 느껴야만 한다. 의미에 대한 욕구, 의미 있음을 알아야 할 욕구는 한 인간의 기본적인 실존적 욕구에 속한다. 하지만 살면서 힘든 환경에서는 삶이 의미 있다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시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p.292
"영적으로 동반하는 직무는 종교 영역과 세속 영역을 넘나든다. 이 직무는 종교의 정신적 보물을 활용할 수 있지만, 교회가 아닌 세속적인 공간에서 살고, 그런 환경에 이해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p.292
"교회는 일정 정도의 심리치료 능력을 포함해 특별한 준비를 시킨 뒤 이 직무를 수행하도록 사제와 평신도 신학자를 파견하는데, 교회를 따르거나 '신앙인'이라고 밝히지 않는 사람들도 이 직무의 대상이다. 파견된 이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며 대화하고, 신뢰와 희망을 북돋우며, 의미를 찾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 사람들을 '신앙을 갖도록 개종'하도록 만들고 교회의 구성원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이들의 과제가 아니다. 동반하는 이들은 그들 의뢰인의 가치관에 대해 뛰어난 공감 능력과 존경심을 지녀야만 한다."

p.293
"'비신앙인'도 기도를 부탁하는 순간이 있고, 전통적 종교의 영적인 공간에서 그다지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직무를 수행할 때도 성사를 포함해 종교적 언어와 상징과 의례에 담긴 치유력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동반자가 이런 영역의 요소를 전부 포기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이곳에 현존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294
"영적인 동행의 왕도王道, 알파와 오메가는 세상과 자기 삶에 대해 관상적 태도를 기르는 것이다. 영적으로 동행하는 사람이 의뢰인들에게 내적인 성찰의 실천, 피상적인 삶에서 떨어져 '깊은 데로 저어 나가는 기술, 자유자재로 거리를 두고 조감도를 그리는 법, 자기 삶을 더 넓은 지평에서 인지하고 체험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의 소명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조용히 기다리라는, 처음 예수님이 미래의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의뢰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관상에 입문할 수 있는지 그 첫걸음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이른바 의미와 접촉할 수 있고, 한계상황과 위기상황에서 삶의 균형과 방향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영적으로 동행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관상적인 사람, 즉 규칙적으로 명상하는 사람일 때만, 의뢰인과 주변 사회에 유익한 직무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의 사명은 영적 식별의 기술을 소개하는 것이다. 식별이 없다면, 현대인은 시끄럽고 혼잡한 세계시장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영적으로 동행하는 이가 '서품을 받은 교회 직무자'란 의미의 '성직자'일 필요는 없지만, 영적인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이어야 그저 피상적인 삶을 살지 않고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p.295
"‘깊은 데로 저어 나간다’라는 뜻이 우리 일상의 세계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의 초점을 내면의 중심으로 옮기는 정도만큼 우리는 하느님을 새롭고 더 완전하게 만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 및 온 세상과도 조화롭게 만날 수 있다! 실재의 깊이로서의 하느님은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이다."

p.297
"역사의 변화 물결 속에서도 우리 신앙이 여전히 그리스도교적 신앙으로 남아 있으려면, 그 정체성의 표징은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 자기 헌신, 자기 초월이다."

p.298
"만약 교회가 성령강림 사건에서 탄생했고, 그 사건이 교회의 역사에서 계속된다면, 교회는 다양한 문화, 민족,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낯선 문화와 다른 신앙의 언어를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해될 수 있도록 말해야 하지,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며, 특히 "심장이 심장에게 말하듯" 신뢰 있게 말해야 한다. 교회는 만남과 대화의 장, 화해와 평화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p.298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타인의 고유함에 대한 수용은 진정한 사랑의 기준이 되는 차원의 행위로 개인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문화, 종교 간의 관계에서도 필수적이다."

p.299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스도교 진리의 최고 형태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이 실현되는 곳이라면, 그곳에 하느님, 그리스도, 그리스도 신앙이 존재한다. 오늘날 교회가 우리가 가진 모든 개념, 정의, 제도보다 더 크신 하느님에 대한 이런 신뢰를 증거한다면, 새롭고 중요한 무엇인가가 시작된다. 바로 신앙의 오후에 들어 서는 것이다."

p.302
"‘우리 마음을 진정시키는’ 기술, 흥분이나 증오 같은 즉각적인 발작을 억제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그 일부인 역사적 사건들을 우리 양심의 성역으로 받아들여, 그곳에서 그것들을 '다시 읽어 내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메시지 암호를 지적으로(명사 ‘지능’이 ‘행간을 읽다’inter-legere와 관련이 있다.) 식별할 수 있다."

p.305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분의 목소리로' 그분을 찾자. 엠마오로 가던 길의 제자들처럼 낯선 이들에게서 그분을 찾자. 토마스 사도처럼 세상의 상처에서 그분을 찾자. 그분이 두려움으로 닫힌 문을 뚫고 지나가시는 곳곳에서 그분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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