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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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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食性 人間

연루됨

하나 뿐인 마음 2025. 3. 3. 15:09

조문영. 글항아리.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다양한 사회문제를 연구해 온 인류학자인 저자가 노동자, 청년, 노인, 여성, 비인간 등을 주제로 비판적 성찰을 담았다.'(한국일보 책소개)는 기사를 보자마자 너무 읽고 싶었던 책이다. 보탤 말이 없기도 하지만  <연루됨>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이 책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회에서 조금은 비켜서 있는 나에게 '혐중'은 아직도 낯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조(라고 해도 될까)인데 저자가 바로잡아주는, 중국에 대한 혐오나 마찬가지인 한국인의 선입견도 매우 읽을 만하다. 


p.58
"페미니스트 학자 세라 아메드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원래부터 두려운 존재여서가 아니다. "공포의 '기호들'(사인)이 도처에 유포되면서 (예컨대) 흑인 타자는 두려운 존재가 '되고' 만다." 혐중을 부추기는 기호들도 자의적으로 선택되고 유통된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불가역적인 표식에 미개함, 불결함, 뻔뻔함 등 예전의 기호들이 덧씌워지고 마구잡이로 조립되면서 혐오는 증식한다."

p.63
"현지조사를 하면서 만나온 평범한 중국인들은 중국을 '중국 국가' '중국 정부'와 곧바로 등치 시키는 위험한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준다. 내가 바라는 삶의 경관이 배타적 주권을 내세우면서 국가 간의 힘겨루기에 매몰되어 있는 세계가 아닌 인간이 서로에게, 다른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공생을 약속하는 세계였음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근대성의 폭력이 누적된 공간에서 버텨오는 동안 '좋은 삶'의 기준이 얼마나 협소해졌는가를, 그럼에도 삶의 취약성을 딛고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평범한 을이 얼마나 많은가를 환기해 준다. 무엇보다 그들은 섣부른 경계와 비난이 관심과 비판을 압도해선 안 된다는 자명한 원칙을 일깨운다."

p.90
"스페인의 정치철학자 아델라 코르티나는 난민과 이주자에 대한 적대의 바탕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있다며, 이를 '가난포비아aporofobia'라 명명했다. 비자발적 빈곤이 한 개인의 정체성도, 선택의 문제도 아니란 점에서, 그는 가난포비아에 다른 유형의 증오나 거부와 구분되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p.111
""가난과 다투는 것은 가난"(이문영, <노랑의 미로>)이지만, 가난을 이해하는 것도 가난이었다."

p.126
"자신의 삶이 가장 비극적이라 생각하는 수많은 피해자가 권리 수호를 위해 온라인에서 서로 혈투를 치르는 동안, 어떤 피해자는 권리들의 사회 바깥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돌고 있다."

p.130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은 의식화•조직화 외부에 놓여 있지 않다. 시장이 섭리고 경쟁이 본성이라는 믿음을 설파하는 게 자본주의 의식화라면, 나는 역사에서 다른 장소에서 진행 중인 또 다른 의식화에 여전히 눈길이 간다. 물질적 빈곤뿐 아니라 실존의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혼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p.144 ~ p.145
"나를 포함해, 이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 바이러스 감염자들은 오늘도 학교와 학원에서, 공장과 회사에서 자기 안전을 확보하느라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일한다. 어떤 삶이 살 만한 삶인지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포기한 채, 과한 연결로 다른 바이러스의 출몰을 조장하고, 임기응변으로 피한다고 야단이고, 서로에게 책을 씌우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지구의 소멸을 앞당기고 있다."

p.156
"전 세계 아이폰 마니아들이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을 앞세운 애플의 깜짝 쇼를 기대하며 들떠 있는 동안, '무균실'에 격리된 인간-로봇들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환경에서 신원 미상의 부품 조립을 반복한다. 마니아를 흥분시키는 불확실성이 이들에겐 고통이다."

p.169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기본 소득을 (토지에서 데이터까지) 지구의 공유부에 대해 모두가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몫으로 인식하고, 국민의 자격을 묻는 성원권이 아닌 ‘현존 presence’에서 이 몫의 근거를 찾는다. 그들이 우리에 속하기 때문(one of us)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among us), 적극적 환대보다 사회적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분배는 인류학자들의 현장연구에서 곧잘 발견된다. 사회적 의무란 “‘인류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문제”이며, 공동의 생존을 위해서는 짜증이 나더라도 타인에게 곁을 내어 줄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기초한다.(퍼거슨,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p.187
"표심을 쫓는 정치인과 자극적인 소재에 목마른 언론, 인터넷을 분노의 배설구로 삼는 대중이 삼각 편대를 이룬 한국의 시선 정치는 소란스럽다. 촌철살인의 공방이 수시로 펼쳐지는 소셜네트워크 링 위에서 모두가 저마다 정의감을 불사르는 가운데, 시선의 폭력에 노출되어도 무방하다 생각하는 적절한 먹잇감을 찾아 집단적인 한풀이를 하는 모양새다."

p.188
"임시방편으로 타인의 시선을 조종하는 대신 끈질기게 편향된 시선을 탈환하고 시야를 확장해 내는 것, 그리하여 한 개인이나 집단을 응징하는 것을 넘어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 이런 시선의 정치는 확실히 품이 많이 든다."

p.196
"선거가 끝나고 2년 여가 흐른 지금까지, 그늘을 없애는 시스템 대신 그늘에 '관심'을 두는 미봉책만 늘었다. 정부는 '약자 복지를 내세우면서 기초생활수급자 생계 급여를 인상했고 수급자 선정에 중요한 기준중위소득을 올렸다. 동시에 재정 파탄도 마다치 않고 부자들을 위한 감세 정책을 양산했고, 노동조합을 '기득권' '카르텔'로 지목하면서 대대적인 탄압 의지를 불살랐다. 파업하는 노동자와 쪽방에서 고립된 수급자를 갈라내고, 후자 중에서도 권리를 외치기보다 국가가 제공하는 보호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을 약자로 끌어안았다. 이 같은 분리 통치는 대통령이 찬양하는 자유민주주의보다 내가 연구해 온 중국의 사회주의와 더 닮았다. (속살을 까보면 양자 간의 공통점이 많기도 하다.) 국가가 정한 규칙 안에서 '예스' 하고 감사할 줄 아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체제 내'와 '체제 외'로 분리하는 통치. '약세군체'로 명명된 이들이 온정적 수혜 대신 권리를 외치고, 노동 NGO를 만들어 저항하면 가차 없이 탄압하는 통치. 이 통치는 양지에도 그늘을 드리우면서 결국 우리를 온정주의적 굴레에 옭아맨다."

p.201
"지구가 무너지는 시대에도 건설과 발전이 당위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돌봄과 수선의 삶이 정당한 대접을 받기란 요원하다."

p.212
"생산성과 효율성 바깥의 삶에 낙인을 씌운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노인의 시간에 금기를 두른다. 아이가 내보이는 의존성은 그가 어른으로 성장했을 때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때문에 관대하게 받아들여지지만, 병들고 노쇠해졌을 때 내보이는 의존성은 어떤 긍정적인 서사도 품기가 어렵다. 그 의존성이 가족과 사회의 생산성을 갉아먹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인의 시간뿐 아니라 노인을 돌보는 사람(주로 여성)의 시간도 의도적 무지의 대상이다."

p.213
"근래 들어 학계와 사회운동 진영에서 '탈시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장애인, 홈리 스, 비혼모,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HIV 감염인 등 '정상성'에서 이탈한 이들을 시설에 격리함으로써 시설 바깥을 '정상화'하 는 통치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생산력 중심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그런데 노인은 어떤가? 아파트 상가마다 한 층 걸러 빼곡히 들어선 요양원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시설이지만, 요양원 '탈시설' 운동은 별반 들어본 적이 없다. 노인의 시간은 여전히 버림의 시간과 동일시된다."

p.240
"풍요로움을 낳는 조건은 각각의 생명이 그 삶을 완수하는 것이고, 생명에서 축적된 에너지가 다음 생명을 기르는 작용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풍요에 대한 내 정의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었는가 깨달았고, 논에 오직 한 가지 식물, 벼만이 넘실거리는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선(善)으로 보았던 것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p.249
"중동에서 온 무슬림 학생부터 일본에서 온 성소수자 학생까지 20만의 세계는 한국 대학에 다양성이란 축복을 선물했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서로가 제 정답만 강요하며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그들이 품고 온 세계를 호기심은커녕 무관심과 냉대, 심지어 조롱으로 대하는 모습을 최근의 뉴스에서 심심찮게 본다."

p.252
"위로의 말은 사람에 따라 결이 달라, 공감을 표현하려 건넨 언어가 피해자에게 상처가 될 여지도 많다."

p.253 ~ p.254
"하지만 이 새로운 미디어는 피해자가 죽을힘을 다해 토해낸 말들에 대해 우리가 예의 있게 화답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가해자가 잘못을 깨닫고 법적 • 도덕적 책임에 화답하는 시간, 피해자의 고통을 묵살한 한국 사회를 성찰하는 시간, 무심코 내뱉었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란 요원해 보인다. 트래픽(서버에 전송되는 데이터의 양)이 광고 수익과 직결되니 자극적인 후속 기사가 쏟아지고 검증되지 않은 뉴스들이 특종으로 포털 메인을 장식하면서, 이해와 공감은 혐오와 적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p.258
"대학에서 학습권이란 내가 배운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때로 논쟁적으로 되짚을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할 권리를 포함한다. 학교가 환경을 미화한답시고 노동자들이 내건 현수막을 바로 떼어내는 행태는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다. 현수막을 읽고 생각할 권리도 학습권이기 때문이다. 고소인들이 소음 시위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으로 규정하며 학습권의 의미를 축소한 데는 대학 책임도 크다."

p.287
"나처럼 가난을 비판적으로 읽는다고 믿는(혹은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주로 '체제'
'구조' '시스템'과 같은 언어를 선호한다. 불행히도 요새는 문제의 겹을 들추면서 재빨리 책임을 면피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휘발성이 강한 낱말이 되었지만. 그러나 가난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저자에게 이 휘발성은 끔찍한 책임 회피다."

p.292 ~ p.293
"약물, 음주, 우울, 불안이 초래한 파괴적 행동을 왜 못 본 체하는가? 왜 분노로 만신창이가 되어 더 약한 자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두고 그들 탓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라며 뒷짐만 지는가? 가난한 사람은 구조와 시스템의 '피해자'이니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가?"

p.298 ~ p.299
"대중교통임에도 어떤 시민은 접근하기 어려운 이동수단을 배타적으로 이용해 온 사람들, 다른 시민이 자신도 대중이라며 출근길에 (자신의 발과 다리이기도 한) 휠체어를 들이밀자 자기 일에 장애가 발생했다며 당혹해하는 사람들은 정말 무고한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불편하다면, 개발의 속도를 늦추고 생산의 리듬을 방해하는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풍경에 섞여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그가 시설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바깥으로 나와선 안 된고 적극적으로 주장을 펴지 않더라도 말이다."

p.310
"삶이 효율과 동일시된 시대를 거부하며 함께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사회, 이 지하철의 속도가 더뎌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 사회, (노들장애인야학 소개글에서 보듯)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연결된" 사회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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