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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어떤 대화 본문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어떤 대화

하나 뿐인 마음 2024. 11. 11. 11:03

원1: (멋쩍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환1: 네, 안녕하세요?
원2: 다리는 좀 어떤가요? 불편하고 많이 아프시지요?
환2: 부러진 곳은 아직도 욱신거려요. 아프면 진통제를 먹고, 또 다리를 올려두고 좀 쉬려고 해요. 처음이 아니라서 불편한 일들을 해결하는 건 예전처럼 막막하진 않은데, 해야 할 일들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마냥 받아야 하는 도움도 많으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요. 답답한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인 거 같아요.
원3: 주로 어떤 것들이 답답한가요?
환3: (생각하는 듯) 서로의 처지가 다르니 거기에서 오는 ‘거리감’ 같은 게 힘들어요. 제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어려워하거든요. 어쩔 수 없을 때 슬프고 외로운데 이 거리감도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서요. 말을 하자니 내가 참고 견디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 같고, 지금도 이렇게 도움을 받는데 싶어 필요한 도움도 어떤 때는 참게 돼요. 이게 잘못은 아니겠지만 힘든 것도 사실이니까요. (조금 망설이다가) 계단 1층만 내려오면 되는데 하는 입장과 정작 목발로 계단을 1층 내려가야 하는 입장은 정말 엄청난 차이예요. 
원4: 마음에 담아두어야 하는 게 많으니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힘드실 거 같아요. 직접 말하기 어려울테니 저에게 좀 털어놓아 보면 어떨까요? 제가 잘 기억해서 다른 환자분들을 만날 때 마음을 더 써볼게요.
환4: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에요. 이참에 잘 쉬라는데, 다리가 불편하니 어떤 자세도 편안하지 않거든요. 좋아하는 책 실컷 읽으라는 말도 분명 나를 위한 말인데, 집중도 안 되고 자세를 잡기가 어려워서 그나마 좋아하는 책도 지금은 좋아서 읽는다기보다는 잊기 위해 읽는다 싶기도 해요. (조금 시무룩하다) 분명 날 위해 하는 말들이고 내가 견뎌야 하는 부분인 건 맞는데, 쉬는 사람인 것처럼, 이참에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엔 거리감이 느껴져요. 마음이 자꾸 좁아져요...
원5: (안타까운 듯이) 맞아요. 저도 아플 때 그런 생각 자주 들었어요. 안하려고 해도 말이죠. 
환5: 그런 생각들에서 놓여나고 싶은데 쉽지 않아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았거나 감사했던 일들을 일부러 자꾸 떠올려 봐요.
원6: 그런 기억들이 도움이 되지요. 좋은 기억이 많은가요?
환6: 네, 제 생각에는 많아요. 기억하기 위해 일부러 적어 두는 것도 있지만, 그런 때를 떠올리면서 힘을 내려고 하는 편이에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 중에, 시간상으로는 짧았지만 가족과의 행복했던 기억이 오히려 수도생활을 지탱할 큰 힘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살면 살수록 더 공감하게 돼요. 제 어릴 적 추억도 그렇고요. 제 삶에 더욱 감사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거든요. 
원7: 우리의 기억들도 다 기도가 된다는 건 정말 맞는 말 같아요. 혹시, 그렇게 해도 쉽게 털어지지 않는 일들도 있을까요?
환7: 음... 내 일들을 나눠야 하는 것도 쉽진 않아요. 제가 해야 하는 밥당번이나 청소, 빨래, 집안정리, 하다못해 방 쓰레기나 들고 내려가야 하는 가방 하나까지도 수녀님들께 다 맡겨야 하니까요. 다들 흔쾌히 맡아서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늘 가지게 돼요. 한편으로는 얼른 잘 낫고 나서 더 잘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미안함을 좀 누그러뜨리려고 해요. 다행인 것은, 지금 함께 사는 수녀님들이 저와 친분이 있는 수녀님들이라 한결 마음이 편해요. 지금은 일이 아주 많은 시기가 아니기도 하고... (좀 주저하다가) 지금 내가 좀 더 내 마음을 다독여주고 싶은 부분은, 의기소침해지는 때예요.
원8: 아플 때는 많은 부분이 취약해지지요. 어떨 때 마음이 가장 약해지고 힘들어지나요?
환8: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지...하고 생각해야할 때 그래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지 싶을 때요. 발목이 접질려서 골절된 건 후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심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자주 다치고 아플 일이 생길 때 그래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자꾸 서운해요. 제가 혼자 있을 걸 좋아하지만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자꾸 옛날 어린이로 돌아가요.
원9: (공감하듯)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어릴 적에 혼자 감당해야 해서 힘들었던 적이 많았나요? 그럴 때 어떤 감정이 주로 밀려오나요?
환9: 여러 장면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혼자 큰 가방을 메고 학교를 걸어가는 장면이에요. 부모님이 연세가 있으시니까 저를 혼자서도 잘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하셨어요. 그래서 입학 첫날만 엄마가 함께 학교에 가서 문구사 아저씨랑 인사 시켜주고 혹시 돈을 못 가져오더라도 준비물을 챙겨주시면 나중에 드리겠다 약속하신 후로 저는 줄곧 혼자 학교에 갔어요. 학교가 멀어서 저학년일 때 친구들은 엄마랑 같이 학교에 갔거든요. 대부분 저도 친구들과 친구 엄마와 함께 가긴 했는데 몸이 좀 안 좋거나 시간이 안 맞을 때는 혼자서 그 길을 가야했어요. 힘들고 외롭기도 했던 그때가 종종 생각나요. (잠시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제가 그때도 키가 작았는데, 커다란 가방을 혼자서 메고 가던 그 길 위의 어린 아이가 느꼈던 외로움, 버거움, 체념 같은 것들이 소환되어서 성인이 되어서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때의 감정에 자꾸 빠져요. 등교 때만이 아니라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일들이 가끔 있었어요.
원10: 그 아이는 그럴 때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환10: 어렸을 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참았지요.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는,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시니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때도 생각했나 봐요. 다만 저도 어렸으니까 버거웠겠지요. 돌아보니 그땐 참거나 올라오는 감정들을 무디게 하면서 지나간 거 같아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인가 비가 오는 날 엄마가 하교 시간에 맞춰 우산을 가지고 나오신 걸 본 친구가, “너희 엄마는 비 오는 날 한 번도 나오시지 않은 적이 없으셔.”라고 말했는데 그때 뭔가 마음 안의 매듭 하나가 탁 하면서 스르르 풀렸어요.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 12년 내내 우산이 없어 비를 맞고 집으로 온 적이 단 하루도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부터예요, 내가 한 면만 보면서 힘들어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예요.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여전히 힘든 감정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스스로 자꾸 고립되도록 하지만, 내가 놓쳐버린 좋은 기억이나 선물 같은 일들을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해요. 그리고 이 과정은 나에게 있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또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원11: (안심하듯) 보물찾기 하듯 일상에서 은총을 찾고, 기억 속에서도 그렇게 감사할 일을 찾으며 기도하는 습관을 오래도록 잘 유지했으면 좋겠어요. 아는 것을 잘 유지하는 것도 기도가 필요한 일이더라구요.
환11: 맞아요. 잘 하던 일도 귀찮아서 하지 않으면 어느새 안하게 되더라구요. 어릴 적 아이가 느꼈던 감정으로 자꾸 돌아가면 오늘의 이 시간도 떠올리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조용하지만 재미있고 때론 서글서글한 모습의 나’를 되찾고 싶어요.
원12: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라요. 저도 한마음으로 기도할게요. 지금 아픈 건 좀 어때요?
환12: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점차 좋아지고 있지만 부러진 곳이 아직 아프고 자세 때문에 허리도 좀 힘들어요. 비슷한 이야기지만, 이 아픈 건 지금 잘 견디는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지나갈 일이라 잘 버텨보려구요. 아프다고 여기저기서 염려해주는 연락과 잘 먹어야 한다고 보내주는 선물들을 과분하게 받으면서, 힘을 내고 있어요. 저도 되갚아줄 기회를 노리면서요. 더불어서 뼈가 얼른 잘 붙어서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되도록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좀 더 많이 기도해요.
원13: 제 기도도 한껏 보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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