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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그리스도론에서의 부흥의 파도) 본문

雜食性 人間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그리스도론에서의 부흥의 파도)

하나 뿐인 마음 2023. 10. 2. 22:00

 
엘리자베스 A. 존슨 지음. 김영선·김옥주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저자의 후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부흥의 파도가 해변에 와서 부서지며 흩어지는 은유로 현대 그리스도론의 발전을 살펴보았다. 우리 세대에 신학은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되찾고 있으며, 그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회상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해방의 힘을 깨닫고 있으며, 세상의 사람들과 지구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그의 힘의 넓이와 깊이를 연구하고 있다."
 
Consider Jesus.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이들은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가 사랑한 세상도, 예수가 사랑한 사람들 모두도 깊이 생각했다. 사랑을 할수록 사랑이 깊어지고 넓어지듯 신학도 깊이 생각하는 마음과 더불어 그렇게 '발전'했다. 영원에 가 닿을 세상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100년도 채 못되는 시간을 살고 있지만 예수와 함께 지금을 성실히 살아낸 사람들 덕에 견고하다못해 난공불락 같았던 신학도 조금씩 부서지며 오히려 아름답게 완성되어 가는 중이 아닐까.
 
각각의 신학에 대한 이해도 도와주지만 파도가 밀려오듯 각각의 신학이 밀려오고 부서지고 가라앉는? 과정을 이해하고 숙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절판되어서 책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결국 여러 사람의 도움을 빌려서 인쇄본을 구할 수 있었고, 구하는 과정 동안 많은 이들의 도움이 파도처럼 내게 밀려와 닿았다. 어떤 신부님은 대전교구 신학교에서는 이 책을 신입생 필독서로 읽혔다고 하셨는데 (신입생이 소화하기엔) 쉽지는 않았겠지만, 총체적 지평을 조금이라도 넓히는 데는 큰 도움이 될 훌륭한 입문서인 건 분명하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번역이었다. 번역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라 저자 수녀님이 사용한 단어를 가톨릭에서 번역하는 우리말 단어가 고유하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고 수녀님의 다른 책 <하느님의 백한번째 이름>을 함세웅 신부님의 번역으로 읽은 기억이 너무 좋아서 더 아쉬웠던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단어 하나하나를 머리 속으로 바꿔가면서 그야말로 '깊이 생각하며' 읽을 수 있었다. 아주 잠깐, 언젠가는 영어로 다시 읽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금세 접었고, 인쇄본이나마 잘 간직하고 있어야겠지. 수녀님의 책인데도 한국 가톨릭에서는 번역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이유를 짐작하고 싶지 않다.), 그나마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고마운 수고를 들여 번역을 했지만 이제 절판이라 구하기가 어려워 많은 이들에게 권할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 속상하다. 그래도 내 후배들은 이거 좀 읽었으면...


 p.42 ~ p.43
"하느님의 자기(self)는 존재의 세 가지 방식 또는 실체의 독특한 세 가지 양식을 지닌다. 라너가 자세히 설명하였듯, 하느님은 신적인 실체 안에 계신 분으로서 우리가 하느님을 근원이 없으며 모든 것의 원천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성부라고 부른다. 또한 하느님은 자기-표현, 자기-말함 그리고 자기-나아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하느님을 생각할 때 하느님을 말씀 또는 아들로 부른다. 그리고 세 번째로 연합하는 사랑의 능력, 항상 신적인 자기-표현을 근원적 통일로 되돌리는 힘으로서의 하느님이 계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으로서 말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성령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자기실체의 세 가지 독특한 방식으로 하느님이 존재한다."

p.44
"사랑으로 창조하고 구속하신 하느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사랑하는 피조물들의 낮춰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장과 향상에 의해 영광 받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인간적일수록, 하느님은 더욱 기뻐하신다."

p.45
"경험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덜 성숙한 자아가 아니라 더욱 온전하며 진실한 자아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라너가 우리에게 도전을 던진 것처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감과 진정한 인간의 자율은 반비례가 아니라 서로 정비례로 증가한다.” 사람이 좀 더 충만한 사람이 될수록, 하느님은 우리를 붙드신다."

p.64 ~ p.65
"예수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으로 고백되기 전에,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삼위일체론적 도식의 변형을 겪어야만 했다. 이 질문을 숙지하기 위한 또 다른 길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예수가 기도하였을 때, 그는 그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나?” 아니다. 그는 야훼, 그가 “아바”라고 불렀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기도했다. 범주적 지식의 명백한 말들과 개념들 속에서, 그는 그 자신을 신적인 개념들을 통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메시아!였으나, 그는 이것을 그의 생애를 거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메시아성에 대해 뚜렷이 지각하게 되었다. 십자가형과 부활 이후 몇십 년 안에, 그리고 초기 공의회의 몇 세기에 걸쳐 교회가 한일은 예수의 인격(person)과 사역 안에 이미 암묵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을 명쾌하게 하는 일이었다. 교회는 이것을 끄집어내어 교리들로 만들었다."

p.70 ~ p.71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안녕(well-being)이다. 하느님은 온전함, 치유, 그리고 우리 모두와 전 피조물의 구원을 원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통치는 모든 사람 사이의 정의와 평화, 모든 곳에서의 치유와 온전함, 모든 자들이 함께 누리는 삶의 충만함과 관계한다. 그것이 바로 성서가 부르는 ‘샬롬’의 상황, 즉 전쟁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삶의 충만함으로써의 평화에 대한 경험이다. 하느님이 이것이 실현되기를 원하시며, 세계가 이와 같이 되기를 희망한다."

p.76
"사랑은 하느님의 통치의 핵심에 있다. 그것은 쉽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형에서의 자기-내어줌의 사랑(self-giving love)이다. 그같은 사랑이 율법을 세우고, 그것을 바른 견해 안에 놓이게 하며, 그것을 완성시킨다. 이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면서, 예수는 해방시키는 삶의 형태를 창조하고 선을 행하는 놀라운 자유를 보여준다."

p.80
"예수는 죽음에서 무(nothing)로 돌아가기보다는 죽음으로써 하느님께 돌아갔다. 그가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사람이었듯이-그의 상처가 그것의 증거이다.- 그는 완전하고 총체적으로 부활하였다."

p.83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그 사건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변화시키는 말하기(telling)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살아 있게 하고, 임재하게 하며, 우리를 사랑과 증언의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말하기이다."

p.98
"평화와 정의는 하느님의 통치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즉 억압, 폭력, 불의, 완전파괴에 대한 위협으로 점철된 이 시대에 이러한 증거들을 좀 더 가시적으로 만드는 일이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에 속한다. 이 길 위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제자들의 삶의 희생을 의미한다. 주인보다 더 큰 종은 없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역사의 충돌들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증거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기억에서, 성령 안에서, 지속되는 그의 임재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의 도래에 다른 마지막 승리에 대한 희망에서 용기를 얻는다."

p.117 ~ p.118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무시하고 수천만의 사람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가진 현재의 상황을 암묵적으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해방자’로 명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 자신들을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정의를 위한 투쟁에 예수와 함께 사역하는 데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p.124
"인종주의가 사람의 피부색이나 인종의 유산(ethnic heritage)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이미 운명지어진 ’장소‘에 유색인을 가두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성별에 기초를 둔 성차별주의 또한 여자를 남자보다 필연적으로 하등한 존재로 간주하고 그들을 적절한 ’장소‘에 유지시키기 위한 강력한 세력들을 형성하였다. 이 두 ’주의‘(isms) 안에서 신체적 특징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세워지고 사람의 본래적 존엄성을 훼손시켰다."

p.124
"압제에는 근본적인 교합(interlocking)이 있다. 여성들의 고유한 권리를 무시하고 그들을 진정한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는 이러한 종류의 태도는 다른 인종이나 다른 경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태도와 동일하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타자성(otherness)을 상대하는 데 있어, 혹은 그들을 온전한 사람으로서 인정하는 데 있어 이러한 편견적 태도는 자신의 무능함에 기인한다."

p.134
"하느님 통치의 비전은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고 서로 존중하는 방식으로 상호관계를 맺는 공동체의 비전이다. 여성신학자들은 예수의 선포 속에서 기존의 구조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하느님의 통치 안에서는 우선적으로 중시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발견한다. 하느님의 통치는 차별을 뒤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래 묵은 차별의 유형을 부수고 새로운 관계의 유형을 세우는 데 있다."

p.134 ~ p.135
"예수가 호칭한 ‘아바’ 하느님 또한 여성을 자유롭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해하는 ‘아바’ 하느님은 군림하는 가부장과는 매우 반대적인 모습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친밀하고 친근한 ‘아바’는 어떠한 지배 형태이든 그 상태에 놓인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며 전혀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촉구한다(마태 23,9-12). ‘아바’ 하느님은 상호교류의 인간 공동체를 창조한다. 정통적 가부장 제도와는 거리가 먼, ‘아바’는 그것을 뒤엎고, 그 자리에 형제자매의 공동체를 세운다."

p.135
"한 여성 신학자는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남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좀 더 많은 남자들이 예수와 같지 않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p.141
"하느님은 이 고난과 어떤 연관이 있으신가? 하느님은 고난을 원하시는가? 하느님은 고난을 원치는 않아도 허용은 하는 것인가? 고난은 하느님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사랑하는 피조물들이 고통 받을 때 하느님은 고통 받으시는가? 고통에 잠긴 세상에서 하느님은 그 고난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론, 특별히 십자가는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상황에 관계하는가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야만 하는가?"

p.147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하느님은 사람들이 영향 받는 것에 영향 받고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짓고 고통 받을 때 이것은 그 신적인 존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하느님은 연약함이나 결핍으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사랑으로 고통 받는다."

p.148
"각자가 서로 상실로 고통 받지만, 그들이 사랑 안에서 그처럼 깊이 연합되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공통된 사랑의 뜻 가운데, 희생의 대가와는 상관없이 계시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곧 성령이다. 예수의 죽음에서 그의 영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부어졌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창조 안으로 출현하며 구속을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p.148 ~ p.149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고통이 하느님의 존재 안으로 취해지는 길을 개방하였다. 하느님은 십자가 위에서 지금 세상의 아픔이 자신 안으로 유입되도록 자신이 자유롭게 내어준 사랑을 통하여 역사와 밀접하게 관계하게 되었다. 거기서 신적인 사랑의 능력은 그것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며, 구원한다. 사랑의 신비한 힘으로, 고난의 모든 부정성은 하느님에 의해 만져지고 승리에 찬 생명으로 탈바꿈된다."

p.150 ~ p.151
"인간의 삶에 유익한 고난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일상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며 우리의 성품을 발전시키고, 고난 받는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긍휼한 사랑으로 마음을 개방하는 데 일조한다. 어떤 고난은 천박함과 얄팍함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 그러나 세상에는 너무 많은 다른 고난들, 즉 성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고난이 있다. 이 고난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 때문에 수천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부당한 고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 고난은 역사 속에서 무리수(surb)와 같다. 말이 전혀 안 된다. 고난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구축된 모든 이론을 파괴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 안에서 작용하는 악에 대한 풀리지 않는 신비이다."

p.164
"아테네에 있는 바오로와 같이, 선교사는 이름 없이 예배되고 있는 하느님의 이름을 선포한다. 선교사는 사람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음을 인식하도록 요청한다."

p.168
"사람들이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든 하느님은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

p.168 ~ p.169
"성 토요일에 대한 명상에서 한스 우스 본 발타자는 보편구원의 신비에 관한 놀라운 비유를 고안하였다. 십자가 죽음 후에 예수는 지옥으로 내려갔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그늘진 장소, 스홀(Sheol) 또는 구약성서의 정의로운 남녀들이 천국의 문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소가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의 지옥, 강퍅한 죄인들의 지옥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조용히 지옥으로 들어가 버림받은 자들과 그저 함께 거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그들이 자신을 위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보았을 때, 즉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와 흉터를 남긴 십자가에서조차 자기를 비우신 사랑을 보았을 때, 가장 완고했던 죄인의 마음까지도 녹아버리게 된다. 만약 그리스도가 의기양양하게 지옥으로 들어갔다면, 또는 그들이 회개하는 마지막 기회가 아니면 “그 외의 것”을 허세부리듯 주었다면, 저항은 격렬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 파멸의 어둠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간 그와 같은 사랑에 저항할 수 있는가? 십자가를 통한 그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결국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차단하였던 자들까지도 포함하여, 사랑하는 피조물들의 되돌아온 사랑(the return love)을 쟁취하신다. 적어도, 본 발타쟈가 말하는 길,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이다."

p.170
"예수의 이야기는 인간들이 이익을 위해 지구를 약탈하는 탐욕과 무례함으로부터 전환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위해 다시 상기되고 있다. 하느님의 통치에 관한 예수의 비전은 작금의 위계적 가치 체계에서 가장 낮게 취급되는 인간 이외의 것들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온전함(wholeness)과 샬롬(shalom)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평화는 생명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연결되며 가장 힘없는 존재에 대한 착취에 대항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피조물 전체는 상호성과 상호 의존성의 관계 안에서 그 자체의 존엄성을 지니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자 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한 존중성을 가져야 한다."

p.171
"우리가 희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우주 전체의 회복(renewal)을 포함한 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구속을 가져오고 그 중간 기간에 모든 피조물 간의 공동체의 연결망을 세우는 능동적인 힘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영성과 윤리의 모든 것은 지구의 책임감 있는 관리(stewardship)로 우리를 인도한다."

p.172
"안식일의 축제는 지구에 대한 존엄성을 고무시키는 그리스도론을 고취시키는 데 있어 최선의 길을 제공한다. 창세기(1:31-2:3)에서 안식일의 시작은, 7일째 날에 창조한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좋았다고 여기시며 안식하시는 하느님을 사랑스럽게 그리고 있다. 창조 사역을 마감하시며,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신다. 창조자의 비-실용 적이며(non-utilitarian) 평온한 임재가 모든 피조물에게 편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마지막 구속에 대한 실마리이다. 하느님을 실례로 삼아,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강제 노역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날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명령받았다. 어느 누구도, 하물며 동물까지도 어떠한 노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대신 모두 선한 창조 안에서 창조자의 임재에 즐거워하며 찬양을 드렸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향 아래, 이날의 그리스도교 축제는 한 주일의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옮겨졌다. 지금 창조는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약속에 대한 표적(sign)으로써 부활한 몸이 지구 전체와 연대한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프리즘(prims)을 통해 이해되고 있다."

p.173
"생태학적 정의를 위한 이러한 관심은 사람들 사이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열정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피조물과의 필연적인 연관을 이끌어내면서, 해방신학은 안식일의 축제를 압제받은 사람들에 의한 전복적 활동(subversive activity)으로서 권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잔인함으로부터 쉼을 얻어, 찬양하기 위해 모이고, 함께 나누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저항의 표시이며, 실제로 그들의 영이 파괴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들은 이 압제에서 자유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 있다. 절망에 굴복하는 것은 압제자들의 승리를 의미한다.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기념하며, 기뻐하고, 안식하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주어진 약속을 맛보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은 파괴 세력들에 대한 깊은 저항에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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