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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사라진 저녁 본문
권정민 그림책. 창비.
며칠 전 '적절한 좌절'에 관한 글을 읽었다. 나 역시 모퉁이를 돌면서, 벽 앞에 서서, 장애물을 치워가면서, 햇빛을 맞고 비바람을 통과하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무언가가 지나가도록 내 걸음을 멈추면서 배우는 게 있다고 믿는다. 이 배움은 삶을 무르익게 하는 '뜸' 같은 것이 아닐까. 물을 붓고 뜨겁게 끓이기만 한다고 쌀이 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열기를 품은 채 뚜껑을 열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쌀알 속까지 열이든 수분이든 잘 배어들어 향긋한 밥이 되듯, 열기를 견디고 긴장을 견디며 기다리는 시간이 주는 무르익음. 비대면의 편리함과 신속성이 너무 쉽게, 빨리 지워버리는 것이 있다는 걸 조금 섬뜩하게 보여주는 책이었다. 책을 덮을 즈음엔, 저녁이 사라지는 것은 차라리 시작이겠다 싶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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