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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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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食性 人間

분더카머

하나 뿐인 마음 2021. 9. 3. 09:27

윤경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읽기 시작하자마자 홀린듯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고, 책장마다 단어마다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몽롱하면서도 분명한 기억의 어느 순간으로 혹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정말 태어나서 이런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대학생 때 보았던 쥬만지 영화처럼, 주사위를 던진 순간 아니 책장을 넘기고 단어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속절없이 어디론가로 끌려갔다. 낙서와 눈물, 몽당 연필과 운동화 한 짝, 머리 방울과 외할매 다락방... 기억과 추억 사이 구석구석, 나만 보았던 어느 한 장면으로, 나만 잊고 있었던 낡은 사물로, 나만 기억하는 그 사람한테로 나를 떼밀던 책. 이게 과연 책이었던가.

말수는 적지만 생각은 쿨하고 마음은 넉넉한 할머니였던 우리 외할매. 외할매집 다락방은 우리집 다락방과 달리 의자 없이 내 키로도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여느집 다락이 다 그렇듯 귀한 것들과 요긴하지만 매일 쓰지 않는 것들과 버리기 아까워 남겨뒀지만 이제는 기억에서 잊힌 것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차 있었다. 명절이 가까워오면 할머니 집 여기저기에는 강정(나는 그걸 아주 오랫동안 오꼬시라고 불렀다.)이 한가득 담긴 커다란 비닐 봉지들이 있었는데 하얀 쌀과 땅콩이 드문드문 섞인 오꼬시는 방 구석에, 누룽지 강정, 까만콩이나 땅콩, 깨로만 만든 비싸고 귀한 오꼬시는 할매 방 다락 구석에 있었다. 다락에 두었던 비닐 속 오꼬시는 명절 당일 친척들이 오면 꽃과 학이 그려진 찬합에 고이 담아 내놓는 외할매의 선물이었고, 명절이 지나고 나면 외할매와 가장 가까이 살았던 나만이 거의 독차지했던 두고두고 먹을 간식거리. 땅콩을 좋아했던 건 맞지만 까만콩까지 내가 좋아했던가. 참깨든 검정깨든 그런 오꼬시도 내가 좋아했던가. 다락방에 있다는 이유로, 찬합에 담아져 나온다는 이유로 그 오꼬시가 맛있을 이유는 충분했고 나는 아직도 오꼬시를 먹던 그 날들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분더카머는, 외할매집 다정하고 아담한 다락방이었고, 할매 다락방에 있던 콩 땅콩 깨 오꼬시 같아 매일 조금씩 베어물듯 읽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읽으면서 나를 떠올렸다는 그. 말도 없이 무작정 내가 있을 법한 곳으로 책을 보냈고, 나는 그 이름을 확인하면서도 설마 했었다. 그리고 나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생각한 나를. 그리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나의 이야기를.


p.30
"우리는 진정 문학으로 치유되는가."

p.34 ~ p.35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쩌면 불구자다. 어떤 기관이 취약해지는가. 어떤 기능이 멈추는가. 라멜리의 책 바퀴는 독서 중에 발생하는, 단지 다리만은 아닌 다른 상상적 신체 기관이나 정신적 활동으로 전이되는, 독자의 불구성에 대해 사유해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독자가 문학에, 인간이 언어에, 치러야 하는 공정한 값이기도 할 것이다. 기분 전환과 치유 대신 부분적 불능에 모종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우리는 훨씬 치명적인 불구의 상태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생을 한순간이나마 연장하거나 구원받는지도 모른다."

p.49 ~ p.50
"사람은 잘못으로부터 배운다고 한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틀리다. 분명히 상처를 남긴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착오를 야기하는 마음의 성향을 고치고 결핍된 지적 능력을 발달시키는 대신, 오히려 나는 무심과 미혹이 도무지 교정하거나 개선할 수 없는 내 본성임을 깨닫고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더욱 키워오지나 않았을까."

p.60
"모든 인간적 경험은 수수께끼로 압축 변형됨으로써 망각의 파괴적 영향력을 벗어난다. 예술이든 언어든 인간의 죽음을 넘어 살아남은 것은 수수께끼의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음에 예술가를 품은 사람아, 그러니 너는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고 기이하게 이지러진 수수께끼의 세공인이 되기를.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보다 오래 생을 지속할 수수께끼를 건네주기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네 죽음을 견디며 그것을 무한히 풀 것이다."

p.87
"고통의 원인을 알고, 그것에 미리 대비하고, 심지어 반드시 오는 그것을 두려움이 아주 없지 않아도 기다리게 되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맞이하고 견디고 겪어낼 만해진다. 게다가 적절한 시간이 경과하면 통증은 어느덧 제 몫을 다하고 사라져 있다. 인간은 성숙해 있다."

p.111
"알고 보면, 나는 다소간 폭군적인 면모가 있는 사람이고, 이따금 나의 쾌락을 너에게도 강제하려는 비이성적 욕망을 억누를 수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어, 그러니 너는 나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p.176
"말할 수 없다고는 쉽게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고 짐짓 무심하게 말한다면, 그마저도 말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침묵과 실어를 가장한 언어의 회피, 언어적 나태가 아닌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말하기의 귀찮음, 말하기의 게으름, 말하기의 성가심. 언어적 나태는 무엇보다 미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침묵과 실어보다 더 비극적인 증상이다. "

p.192
"논변 혐오에서 논변의 대상인 지식 혐오로, 지식 혐오에서 지식의 도구인 언어 혐오로,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혐오로, 점차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변질시키는 사람들. 타인의 말을 비판하면서 정확한 논리와 올바른 어법을 촉구하지만, 가만히 통찰하여 들어보면,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사적 술책 속에 언어, 지식, 인간을 향한 강박적 증오와 분노를 욱여 담아 표출할 뿐인 사람들."

p.194
"상처를 무늬처럼 들여다보라는 말을 들었다. "

p.227
"비밀을 해독하되 폭로하지 않기. 타인의 비밀을 내 비밀로 떠맡기.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각자의 허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는 품위 있고 윤리적인 방법이라 믿는다."

p.287
"경계 너머 바로, 중층, 잉여, 초과, 가장자리. 경계를 파열시켜 안에서 밖으로의 범람과 주변부의 증식을 야기하는 덧. 그러나 마음이 그렇게 넘치고 늘어나면 덧정이라 하니, 역시 사전에 따르면, “한곳에 깊은 정을 붙여서 그에 딸린 것까지 사랑스럽게 여기게 된 마음”이다. 덧정은 깊은 데서 솟아 넓게 퍼지는 사랑이다. 타자를 향한 사랑을 넘어 그가 사랑하는 타자들까지 나도 사랑하는 겹겹의 사랑이다. "

p.288 ~ p.289
"이 글은 누가 썼는가. 누구와 누구의 말인가. 아무도 홀로 말하지 않는다."

p.288
"누군가의 평생의 글쓰기는 덧없이 사라진 시간에 못 다한 어떤 말의 뒤늦은 되풀이일 수도, 그 미완성의 투명한 문장 위에 심 없이 뾰족한 목필을 긋고 또 그어 골을 짓는 일. 가는 골은 깊어져 봤자인걸. 그러나 끝없이. 아니면 완강히 침묵으로 회귀하는 말의 끄트머리를 붙잡아 기어코 덧이어 쓰기. 언어의 덧조각 깁기. 느리게. 죽기 전에, 조금이나마, 더."

p.288
"먼저 쓰는 사람이 있고, 그의 글을 소리 없는 메아리처럼 거듭 베끼는 사람이 있다. 미래의 언어를 계획하고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살아남아 그것을 덧이어 실현시켜야 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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