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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영적 성경 해석 본문

雜食性 人間

영적 성경 해석

하나 뿐인 마음 2020. 3. 7. 21:29

엔조 비앙키 지음. 이연학 옮김. 안소근 해설. 분도출판사.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의 후속편. 거룩한 독서의 신학적 원리를 설명하는 다소 가벼운 이론서.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기 위해서,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치기 위해서, 나는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


"사람으로 하여금 ‘신적인 것’에 매료되게 하는 오래된 종교 유행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시절입니다. 여기서는 ‘하느님’뿐 아니라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마저 그 뜻이 공허해진 나머지, 인간의 투사와 욕망으로 가득 찬 말마디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가끔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과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이 살아 계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그 하느님이 맞는가? 참으로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계시해 주고 그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풀이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 맞는가? 그보다는, 사람의 욕망과 기대가 만들어 낸 하느님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우리는 정녕 성경을 귀 기울여 듣고 해석하며 성경으로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안느 참된 지식을 얻고 그분과 만나서, 마침내 그분과 맺는 계약의 거행으로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에 에누리 없이 복종하는 데서만 생깁니다. ‘거룩한 복음의 연속’, 혹은 오늘을 위한 ‘살아 있는 복음 단락’이 되기, 이는 박학다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성인들, 즉 살이 되신 말씀이신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제자들의 삶과 증언에서만 생기는 일입니다."

"요컨대 신앙이야말로 성경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성경을 자주 읽으면서 성경과 대화하는 가운데 주님을 알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열쇠 역시 신앙이다."

"다른 일들을 하는 중에 간간이 듣기도 읽기도 하는 그런 이들이 아니라, 정직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애쓰면서 날마다 밤을 새워 더 깊이 파고드는 이에게만 성경은 이해된다. -오리게네스-"

"성경은 성경 이야기가 독자의 삶과 연관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으로 나아오라고 부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경 해석은 성경과 사람 모두가 함께 품고 있는 갈망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과연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계시헌장 25).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성경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다. 다시 말해 책(경전)의 종교가 아니라 “해석의 종교”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와 그 ‘탐색’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찾으며 그분을 더 깊이 알고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때에야 성경은 비로소 교회 한가운데서 활발히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이때 성경을 교회의 품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해 주면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열어 보여 주고 그분과 만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께서 개인과 공동체로 하여금 성경에 기록된 문자에서 모습을 드러내시는 말씀에 순종하도록 삶의 방향으로 잡아 주시는 것이다."

"영적 성경 독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독자의 삶에 간여하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독자의 삶이 성경의 사건에 그만 ‘연루’되고 만다는 것이다. 성경은 오늘 바로 독자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이에 기도와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

"“누가 스스로 성경을 알아들었다고 믿더라도, 그러한 성경 이해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사랑을 세우지 못한다면 아직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경은 읽고 있는 바를 실천할 때만 읽는 이에게 유익하다.”(히에로니무스)"

"“성경은 사는 만큼 알아듣는다.”

"하느님 말씀과 성경의 관계는 어떠한가? 사실 이 둘은 같지 않다. 말쓰은 성경을 초월하며 성경이 다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가 증언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실 성경을 초월한다. 성경의 저자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에 포함되어(담겨)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 것은 오직 성령의 은총 덕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성경은, 자신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접촉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성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성경 독자가 모름지기 자기가 고백하는 믿음의 실행이 되어야 함은 신앙의 말이요 언어인 성경 언어의 본질 자체가 요청하는 것이다."

"듣기가 벌써 대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본문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성경은 단순히 이해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 움직이는 책이 된다. 그리하여 참된 ‘신학’이 탄생되는 것이니, ‘하느님에 대한’ 말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 그분의 말씀을 받아서 자기도 ‘하느님께 직접 말씀드리게’ 된다."

"‘듣기’는 더 나아가 ‘기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계시헌장25)"

"결국 성경은 기도하면서, 혹은 기도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온 존재로 주님과 나누는 대화에 충만히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알아듣는 책이 성경이다."

"결국 성경은 어떤 ‘부르심’을 담고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듣고 응답하도록 요청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이집트 탈출’을 감행하는 일이요, 그분과 관계 맺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여는 일이며, 대화의 장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그리고 대화의 장에서는 ‘들음’이 가장 중요하다. ‘믿는 이’는 ‘듣는 이’다. 듣는 이는 들음으로써 말씀하시는 분의 현존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분과 인생이 엮이게 되기를 원한다. 듣는 이는 자신 안에 타자가 거처할 공간을 마련한다. 듣는 이는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타자를 신뢰하면서 그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무엇’(내용)을 듣는지에 대해서(마르 4,24참조)뿐 아니라 ‘어떻게’ 들을 것인지에 대해서도(루카 8,18 참조)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 사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듣고 있는 바로 그것에 좌우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형은 들을 줄 아는 인간, “듣는 마음”(1열왕 3,9)을 지닌 인간이다. 듣는 행위의 주체는 ‘마음’, 곧 전인(全人)이다. 사람 내면의 최심부는 ‘들음’으로 형성된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타자를 환대하는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 ‘들음’이 성경 구절을 듣기만 하고 그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대한 영적 ‘식별’을 뜻하는 것이라면,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전례와 거룩한 독서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독서가 요구하는 조건도 바로 이것이다."

 

"성경의 거룩한 독서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여정은, 타자를 만나는 일에 필요한 인간학적 여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서 빠져나와야 하고 자기도취에서 벗어나야 한다. 타자에게 귀를 기울어야 하고, 타자의 내심內心, 그 정수를 포착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타자를 알아야 하고 그의 타자성을 존중해야 하며, 타자의 상대방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자유와 사랑에 토대를 둔 진정한 인간관계에 접어들고 '친교의 모험'을 살아가기 위해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복음 선포는 영원토록 바로 '지금' 벌어지는 사건이란 사실을 유념하는 성경 독서가 필요하다. 복음 선포는 인간의 삶에서 원천이 되고 보편적인 것, 그리고 항구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서, 이미 창세기의 첫 부분에서부터 발견되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마음의 귀를 멀게 하는 수많은 말들과 소음을 잠잠하게 해서 침묵과 고독의 단출한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권위 있는 말씀은 오직 침묵에서, 긴 경청의 여정에서, 그리고 묵상하고 생각하고 성찰하며 되새기는 능력에서만 솟아난다. "

"촛불을 켜고 성화(이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거룩한 독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주님과 만나는 데에 당연히 우리 몸도 한몫을 해야 한다. 거룩한 독서는 마냥 머리만 쓰는 일이 아니라 전 인격과 온몸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거룩한 독서는 많은 일을 하는 중에 짬짬이 하기보다는,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충실히 해 나가는 것이 좋다. 그 중요성을 고려할 때 독서 시간은 한 시간 정도가 마땅하겠으나 시간의 양보다는 매일 꾸준히 하는 자세가 열매를 맺는 비결이다. 사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시간의 양은 각자의 생활 여건과 맡은 일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거룩한 독서는 하느님 말씀이 신앙인의 삶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시도록 허용해 드리는 일과 다름이 없다."

"거룩한 독서는 침묵 중에,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로써 준비해야 한다. 각별히 중요한 것은 성령께 내려와 주십사 기도하는 일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 마음의 귀를 열어 말씀의 이해력을 선사해 주신다.

"체질적으로 ‘지성적인’ 이들은 거룩한 독서를 그저 지식과 아름다움을 즐기는 일 정도로만 생각할 위험이 있다. 사실 본문을 읽으면서 멋진 생각들이 톡톡 튀어 오르는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고, 본문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간파하면서 그만 탐닉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진정하고 깊은 수준의 영적 열매를 맺기는 불가능하다."

"그런 순간에도 충직하게 버티고 머물면서 무기력한 몸을 침묵의 기도로 봉헌해야 한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만 남은 상태라 해도 주님께서는 알아보신다. 어떻든 거룩한 독서에서 하느님 말씀으로 꾸준히 기도하는 일의 효력은 긴 호흡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기억하자."

"거룩한 독서는 더러 사막과도 같이 메마르게 체험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본문에 다가가려는 우리의 노력을 본문이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고, 말씀이 끝내 침묵을 지키실 수도 있으며, 우리 마음에서 기도가 절로 솟아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역시 참된 관계라면 어디서나 다 생기는 일이다. 주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이런 순간들이 면제되지 않는다."

"성경은, 그것을 읽는 공동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공동체 역시 성경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성경 안에서 자기 정체성과 부르심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겪는 사건들에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하고 상황을 잘 분석해야 한다. 그래서 바로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떤 부르심을 받고 있는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어떤 표징이 주어지는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읽기는 사실 삶의 의미와 관련된 것이며, 읽는 이의 내면적 삶을 자극하고 생기 있게 해 주어 마침내 전인적 헌신으로 이끄는 ‘사건’이다. 우리는 깊이 사색하고 성찰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보다 더 독창적이며 천재적인 인격체와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본문 앞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결국 독자와 저자는 같은 인간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책읽기의 어려움은 결국 내적 생활의 어려움, 특히 생각하기의 어려움과 같이 가는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거룩한 독서를 실행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니면 적어도, 기도하는 주체의 내면적 근본 자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읽기가 특별히 잘 진행되고 있는 때는, 읽는 이가 본문에 의해 ‘읽히고 있다’고 느끼는 때이다. 거룩한 독서를 열심히 실천하는 이는, 자기가 성경 본문을 읽는 것보다 성경 본문이 오히려 자기를 더 잘, 그리고 깊이 읽고 있음을 알아채기에 이른다. 사정이 대체로 이러하므로, 내적 생활을 통해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내면의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어야 거룩한 독서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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