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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루카 14,25-33 그분 앞에 '앉아서' 본문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무언가를 '미워해야' 한다니...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과연 이 길을 시작할 수 있을까 자주 생각했다. 셈족 표현에선 비교급이 없어 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길이 없어 굳이 '미워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했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거나 거슬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둘째로 두어서 첫째로 둔 것보다 소홀하게 대한다는 뜻이란 설명을 수십년째 들었어도 '예수님이 정말 내 인생에서 첫번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주저하지 않은 순간은 드물었다. 다른 것들을 미워해야 해서 시작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한 적이 있어서이다. 더 사랑하라는 말이나 용서하라는 말 앞에서, 알면서 쓴약인 줄 알고 버티는 마음보다 약이 아닐거라며 듣고 싶지 않으니 날 내버려두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가장 먼저 나오는 이 문장에 막혀 다음으로 넘어가는 묵상이 쉽지 않았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살다보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행복한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지만 부당하다 생각되고 나만 겪는다 싶으면 감당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즐겁고 기쁜 일도, 버겁고 서러운 일도 모두 내 삶이기에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짊어질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도 비로소 시작된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내 삶의 첫자리에 두는 것 역시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며 내 십자가를 둘째로 두어서 소홀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제자의 삶이요, 내 삶이다.
조금씩 '앉아서'(28절, 31절)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탑을 세우기 전 공사 경비를 '앉아서' 계산해 봐야 하고 이만 명을 거느리고 싸움을 걸어오는 적에게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앉아서' 헤아려 봐야 하듯,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도 넘어서야 할 일들을 만났을 때에도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앉아서' 곰곰이 가늠해 보고 헤아려 보는 일이다. 매일 아침 감실 앞에서 '앉아서' 고요 속에 머물며 들려주시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들을 응시해야 하듯 말이다. 이 삶을 살기 위해 나는 끊임 없이 성당에 앉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첫자리에 두는 일일 테고 내 십자가를 제대로 짊어지는 법을 터득하는 일일 테다. 그분 앞에 앉아야 무엇이 내 십자가인지 알 수 있고, 그분 앞에 머물러야 내 십자가와 내것이 아닌 십자가도 구별할 수 있다.
마지막 말씀이 또 어렵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33절) 단호한 이 말씀을 붙들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앉아서 기다린 시간이 제법 흐른 후 왜 이 말씀을 미리 하시지 않고 마지막에 하셨는지 조금 알것 같았다. 무턱대고 이 말씀만 붙들고 좌절할 일이 아니라, 먼저 말씀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따라갔을 때 길이 열리겠구나. 그래, 모든 걸 내려놓고 내 십자가만 짊어지고 그분을 따랐을 때, 내 십자가 말고 아무것도 지는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나는 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이마저도 그분 앞에 앉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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