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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본문

雜食性 人間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하나 뿐인 마음 2016. 9. 21. 22:23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약한 자에 대한 연민이 어긋나면 강한 자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듯 남성에 대한 증오 역시 어긋난 방향이다. 


더 높아지기 위해 함께 높이 올라가는 방법도 있고 다른 이를 낮추어 나만 높아지는 방법도 있다. 타인을 불행하기 만들어서 내가 행복해지는 그런 세상. 그런 행복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에서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 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거짓말은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여자와 아이가 유독 거짓말을 많이 하는 습성인 것은 아니고, 남자라고 해서 유독 진실한 것은 아니다. 내 주장은 여성이 거짓말을 잘하고 음험하다고 보는 낡은 설정이 여태 일상적으로 제기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성의 신뢰성을 깎아내리는 패턴을 인식하거나 호명한다면, 여성이 무언가를 발언하고 나설 때마다 그녀의 신뢰성을 놓고서 논박하는 일을 건너뛸 수 있을 것이다. 카산드라 신화의 여러 버전 중 가장 유명한 버전에서, 사람들이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게 된 것은 그녀가 아폴론과의 섹스를 거부함으로써 아폴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도 자기 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신뢰성을 잃는 것이 연관된 일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중에 존재하는 현실의 카산드라들에게는 우리가 그 저주를 걷어줄 수 있다. 누구의 말을, 왜 믿을 것인가 하는 선택을 우리가 스스로 내림으로써.


T. M. 루어먼(Luhrmann)은 지난해(2013) 신문에 실은 멋진 기고문에서, 인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는 중요하다. 형사사건의 피고 측 조사관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신이상과 폭력에 관해서라면 속속들이 잘 아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현실과의 접촉을 잃기 시작하면, 병든 뇌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집착적으로,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야. 주변 문화의 질병에."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 발언하고 경청되려는 싸움이다. '이야기 기반 전략 센터'(Center for Story-Based Strategy)는 이것을 이야기의 싸움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내러티브를 통해서 싸움의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똑같은 기사나 블로그 글을 쓰고 또 써야 한다는 게 죽도록 진저리 난다. 그러나 나는 써야 한다. 어떤 사건이든, 이런 범죄의 핵심에는 젠더에 기반한 폭력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동기부여 요인을 빼놓고 말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의 사건에 대해 온전하고 정확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더 나아가 폭력을 이해하고, 경고 징후를 인식하고, 향후 비슷한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분석과 맥락을 놓치는 것이다. -미디어비평가 제니퍼 포즈너(Jennifer Pozner)


언어는 힘이다. '고문'을 '선진적 심문'으로 바꾸거나 살해된 아이들을 '부수적 피해'로 바꾸는 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의 힘을, 우리로 하여금 보고 느끼고 마음을 쓰도록 만드는 언어의 힘을 망가뜨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양면의 날이다. 우리는 단어의 힘을 이용해 의미를 묻어버릴 수 있지만,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나 감정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뜻이며, 하물며 변화시키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특히 페미니즘에서는 더 그럴 것이다. 무릇 페미니즘은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데 집중하는 운동이니까.


강간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강간문화는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강간문화는 모든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는 강간을 염려하여 자신의 행동을 제약한다. 대부분의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는 강간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따라서 강간은 여성 인구 전체가 남성 인구 전체에게 종속된 위치에 머물도록 만드는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강간을 저지르지 않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강간 피해자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페미니즘은 어쩌면 대부분이라고 해도 될 만큼 많은 문화에, 셀 수 없이 많은 조직에, 세상 대부분의 가정에,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우리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렸을 뿐 아니라 아주 오래되고 광범위하게 퍼진 무언가를 바꾸려는 노력이다. 그러니 지난 40, 50년 동안 이토록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매사가 영구적으로 확실하게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하진 않았다고 해서 그게 꼭 실패의 증거는 아니다.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구속은 또 있다. 경쟁과 냉혹함과 단기적 사고와 가혹한 개인주의를 높이 사는 체계, 환경파괴와 무제한 소비를 너무나 잘 뒷받침하는 체제, 한마디로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최악의 마초성을 현실로 구현하고, 지구에 존재하는 최선의 것들을 파괴한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이런 체제에 좀 더 잘 적응하긴 하지만, 이 체제는 사실 둘 중 어느 쪽에도 진정으로 유익하지 않다.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적어도 너희들의 처지에 대해 미안하고 속상하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나부터 노력하겠다, 그리고 함께 바꾸어 가자,라고 말하기 바란다. 누군가 화분을 쓰러뜨려 놓았고 지나가던 이가 그 화분에 걸려 넘어져 비명을 질렀는데 넘어진 이에게 "내가 한 건 아니야!"라고 손사레치지 않길 바란다. 다치지 않았는지 묻고 살피며 함께 그 화분을 치우길 바란다. 다친 이가 지금 당장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라면 그대라도 그 화분을 치우기를 바란다. 

이 말에 대한 실천은 물론 나부터 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하자고 손내밀기 위해 굳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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