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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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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 contemplativa

미끄럼틀

하나 뿐인 마음 2013. 7. 31. 14:34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겁이 없는 편이다. 귀신 무서워 화장실 못간다 해본 적도 없고, 밤늦게까지 놀고도 혼자 집에 잘 가던 아가씨??였다. 학생 때도 겁없이 놀러 다니고 수업도 빼먹었다. 지금도 여전히 겁이 없어 이곳에 와 세 번의 고배를 마시고 겨우 면허를 딴 이유도 겁없는 운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겁없음은 놀이기구를 탈 때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바이킹 같은 건 물론이거니와 빙빙 돌고 툭 떨어지고 하는 모든 것들을 웃으면서 탈 정도다. 물론 지금은 수건 벗겨질까봐 못타긴 한다만.


어릴 적 아버지랑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에는 항상 바오로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영선 국민학교를 들러 그네를 타거나 미끄럼틀을 타곤 했다. 그네는 아버지가 밀어주셔야 하기도 하고, 누군가가 일단 타고 있으면 비켜주기 전에는 탈 기회가 없으니까(나도 그렇고 울 아버지도 그렇게 좀 기다렸다고 해서 비켜달라는 말 같은 거 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아예 미끄럼틀에 올라가곤 했다. 이건 순서 기다렸다가 후다닥 타고 내려오면 되니까. 그래서 미끄럼틀을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처음부터 코끼리 놀이터를 들르기도 했다. 


미끄럼틀 위에 오르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좋았고, 왠지 바람이 더 시원하게 불어오는 것같아 좋았다. 아버지가 날 웃으면서 지켜보시는 것도 좋았고, 가만히 내 몸을 맡기면 된다는 것도 좋았다. 재밌게, 오래, 신나게 내려오기 위해서는 올라가는 수고도 많아야 했다. 좁은 계단을 올라 그 위에 서서 잠시 아래를 내려다 본 후 눈을 감고 내 몸을 맡기면... 순식간에 착지! 좀더 높은 미끄럼틀에서 떨어지면 좀더 오래 탈 수 있겠다는 건 내 생각일 뿐 실제로 그럴 몸으로 느끼진 못했다. 그 어떤 미끄럼틀도 내겐 '순간!'이었으니까. 게다가 가속도라는 게 있으니 실제로도 시간의 차이가 없을듯하다. 하여튼 나는 매번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 미끄럼틀을 올랐던 거다. 


하지만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기분좋게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 감고 미끄럼틀을 탔는데, 찰나가 흘렀을 뿐인데 눈을 떠보니 혼자인 것 같은. 혼자 남았다. 찰나가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겁없는 내가 가끔 혼자서, 아무도 몰래, 덜컥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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