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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 본문
허찬욱 에세이. 생활성서.
작년 축일에 동생 수녀님한테 선물 받은 책인데 이제야 읽었다. 강론집이나 묵상집 같은 종류의 책은 잘 읽지 않아서 선물 받고 나서도 그냥 꽂아두기만 했는데 책장 정리도 할겸 싶어서 꺼냈다가 ‘안 봤으면 손해였겠구나.’ 싶었다. 읽기 시작한 후로는 책꽂이에 꽂아 두고 난초를 보듯 바라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수녀원 성당 자리에 꽂아두고, 영적독서 시간에만, 일부러 천천히, 기도하듯 읽었다.
그윽하다
1) 깊숙하여 아늑하고 고요하다.
2) 뜻이나 생각 따위가 깊거나 간절하다.
3) 느낌이 은근하다.
그래, 그윽한 난초가 떠올랐다. 군더더기 없이 곧게 오르다가 부드럽게 휘는 가지. 꽃향이 있어도 없어도(꽃이 피지 않은 난초와 더 가깝지만) 자체로 그윽한 난초.
p.16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이해하는 것은 사실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나의 고통입니다. 나는 타인이 겪는 상황을 나에게 대입한 후, 일종의 추체험으로 내 안에 특정한 감정을 불러내고, 그 감정을 타인이 겪을 법한 감정과 겹쳐 봅니다. 나는 내 안에 번져 오는 아픔을 관찰하며, 타인도 나와 같은 아픔일 거라 추측할 뿐입니다."
p.17
"타인의 고통은 마지막까지 나에게 발견되지 않은 땅, 가닿지 못한 미답지로 남습니다. 사람 사이 건널 수 없는 간극은 모든 인간의 한계일 것입니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 는 데 조금씩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탓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패하고도 실패한 줄을 모르고 남의 고통을 안다고 함부로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탓입니다."
p.46
"빨리 답을 내려는 유혹만 잘 견뎌도, 우리는 좀 더 유연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 글을 읽고 쓰며 생각을 다듬는 이유는 빨리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정답으로 여기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겠지요. 요컨대 책을 읽고 쓰는 이유는 나의 생각과 끊임없이 싸우기 위해서일 겁니다."
p.63
"주어진 생각을 주어진 방식으로 반복하는 사람에게 성찰을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성찰은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다른 언어로 해석하고 표현하려 노력하는 이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요. 언어의 부재는 성찰의 부재로 이어지고, 성찰의 부재는 죄책감 없는 폭력을 낳습니다."
p.64 ~ p.65
"작은 이야기들이 많아져야, 거대 담론이 무너지고 독단의 언어가 힘을 잃습니다.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언어가 가장 강력한 언어이지요.
권력의 언어가 강력한 것은 자주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전횡을 일삼는 권력을 견제하고 싶다면, 권력자들이 쓰는 언어가 아니라 권력과는 상관없는 언어로 세계를 자주 해석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p.91
"강한 존재는 약한 자극에 둔감합니다. 자극의 역치 가 높아진 강한 존재에게 어지간한 소리는 소리도 아니며, 어지간한 빛은 빛도 아닙니다. 그래서 강한 존재는 강한 자극을 함부로 뿜어 댑니다. 하지만 약한 존재는 그들이 뿜어 대는 강한 자극이 버겁습니다. 약한 존재는 강한 자극이 주는 불편함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 불편함을 잘 알기에, 약한 존재는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같은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애를 쓰지요. 이렇게 강한 존재는 점점 더 둔감해지고, 약한 존재는 점점 더 섬세해집니다."
p.100
"숨조차 쉴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위로가 되지 않고, 하느님은 침묵하는 순간의 짙은 슬픔 말입니다. 그 순간에는 하느님께라도 따져야 합니다. 하느님이라도 원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에게, 신심 깊은 마음만 가지고 늘어놓는 종교적 위안은 슬퍼하는 사람의 마지막 숨통을 막아 버립니다."
p.102
"하느님은 고통의 끝자락에서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이름입니다. 기도가 원망이 되고, 원망이 저주가 되고, 심지어 살의마저 느껴져 울음이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그 순간을 견뎌 줄 유일한 존재는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이때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원망을 받아 줄 존재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는 원망이니, 이 원망을 불신의 태도라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p.157 ~ p.158
"폭력이 역사 안에서 조금씩이라도 줄어든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선해져서가 아니라, 어떤 폭력은 잊히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의식해서일 겁니다. 어떤 폭력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고, 어떤 폭력은 끝끝내 기억될 것이라고 울부짖는 사람들 앞에서, 가해자들은 같은 폭력을 저지르는 데 조금이라도 망설이게 될 겁니다. 타인의 상처를 기억하는 일에 지쳐서는 안 됩니다. 상처를 기억하는 일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력에 결연히 맞서는 일이 될 테니까요."
p.167
"내가 모르는 생의 이면이 있다는 것을 쓸쓸하게 인정하는 것이 외로움의 본령이라면, 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외롭고 싶습니다. 차라리 외롭고 말지, 당신을 속속들이 안다고 함부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