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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좁은 문, 수도 공동체 본문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좁은 문, 수도 공동체

하나 뿐인 마음 2020. 5. 30. 23:17

 

 

오늘은 사부 베네딕도의 생애로 시작했다. 오랜 만에 수련소에서 성규를 배우던 시절로 돌아가 시편 42편을 묵상하며 사부의 생애를 다시 돌아봤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42,2-3)

이 시편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피정에선가 피정 지도 신부님이 던진 질문이다. '사슴이 배가 너무 고파 독사를 삼키고서는 타는 듯한 고통으로 목을 축일 물을 찾는 심정으로 하느님을 찾는가.' '죽기 직전의 간절한 그리움으로 하느님을 찾는가.'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시작한 유학이었지만 방탕한 문화에 환멸을 느낀 베네딕도 성인가 아름답고 풍요로웠을 도시 로마, 좋아했을 공부마저 뒤로 하고 나선 길은, '하느님을 찾는 길'이었다. 하지만 은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수도 공동체를 세우고 수도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성인은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악마의 유혹이나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는 기본이었고, 모질게도 독을 탄 포도주나 독이 든 빵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성인은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 내리며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 (42,6)

성인도 기도 중에 이렇게 부르짖지 않았을까. 시편 저자가 표현한, 녹아 내리며 신음하는 심정을 나 역시도 조금은 알 듯 하다. 하지만 성인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채 '떠남'을 반복하며 수도생활을 이어가다가 생애 마지막 장소에서, 여태껏 모진 핍박에도 불구하고 회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썼다, 독수도자가 아니라 회수도자들을 위해. 그는 은수자로서 홀로 하느님께 간 것이 아니라 회수도자로서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께 돌아갔다. 좁은 문(마태 7,13)인 공동체 수도생활을 위해서 말이다. 구원 받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 하듯(루카 13,24), 좁은문인 수도 공동체 안에 살면서 가장 굳센 회수도자로서(RB1,13)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RB 머리말 50)고 권고한다. 심지어 이 권고를 '아멘'으로 끝맺으면서 말이다.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문헌인 성규를 묵상하는 30일 피정을 시작한 나의 마지막 기도 역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멘’이기를.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42,12)

입회 첫 날, 넓디 넓은 정원을 지나 처음으로 봉쇄 구역을 넘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영원으로 난 길을 가기 위해 좁은 문을 통과했던 그날처럼, 나는 오늘도 좁은 문을 통과하고 있다. 쉽지 않은 길이 어디 있겠냐마는 세상에서 수도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내게는 '좁은 문'이다.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만나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주님은 내게 '여기'가 '좁은 문'이니 이리로 '들어가도록 힘쓰라' 하신다. 하느님께 바라며, 그분을 다시 찬송하며, 나는 오늘도 좁은 문을 통과하고자 한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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