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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피정 시작 본문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피정 시작

하나 뿐인 마음 2020. 5. 30. 10:45

 

 

한 달 피정을 들어왔다. 나의 깊은 어둠에서 출발하지만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더디 걸어서 그곳에 닿아보려 한다. 고요하되 치열하게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며 첫 만남의 시간에 피정 지향을 '뿌리'라 적었다.

 

벼르고 별러 들어오긴 했지만, 내가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던 2년 전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허락도 모두 구해놓았고, 일도 모두 처리를 해두고, 병원까지 다녀가며 몸도 건강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소임 이동을 하게 되었고, 나의 준비는 하느님의 시간과 달랐다. 오히려 지금 현실은 30일이나 분원과 본당을 비우고 들어올 만하지 않다. 본당 수녀도 2명인 공동체이고 보좌신부님도 없는 성당인데다, 함께 사는 수녀님이 다리가 조금 불편하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로나 19 때문에 본당에 미사 외의 큰 행사들이 없다는 것. 생각지도 못한 이 이유 하나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피정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느님은 나를 이렇게 준비시키신 거였다, 나의 준비 말고 당신의 준비로...

 

뿌리. 내 피정의 지향이다. 사부 성인의 수도 규칙서를 가지고 하는 피정이니 건조하게 생각하더라도 이 피정은 '뿌리를 찾는' 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은 햇빛을 향해 가지를 열심히 뻗고, 계절에 순응하며 꽃피우고 열매 맺고, 시들고 떨구고 사그라드는 때마저 잘 받아들이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필요한 시간이다. 하지만  더불어 나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뿌리가 어디에 가 닿아야 하는지,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무엇보다 튼튼하게,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함을 깨닫고 싶다. 어둠과 고요에 파묻힌 뿌리의 생명력을 느끼고 싶다. 이 피정이 끝나갈 무렵엔, 내 뿌리가 그분께 닿는 게 아니라 그분이 나의 뿌리였음을, 그분처럼 나도 세상에서 뿌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겠지. 

 

뿌리가 나무에게

이현주

 

네가 어린 싹으로 터서 땅속 어둠을 뚫고

태양을 향해 마침내 위로 오를때

나는 오직 아래로

아래로 눈 먼 손 뻗어 어둠 헤치며 내려만 갔다

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때

나는 여전히 아래로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네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춤추는 나비 벌과 삶을 희롱할 때에도

나는 거대한 바위에 맞서 몸살을 하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바늘 끝같은 틈을 찾아야 한다

어느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때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으나

나는 믿는다

내가 이 어둠을 온몸으로 부둥켜 안고 있는 한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

모든 시련 사라지고 가을이 되어

네가 탐스런 열매를 가지마다 맺을때

나는 더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다

잎지고 열매 떨구고 네가 겨울의 휴식에 잠길 때에도

나는 흙에 묻혀 가쁘게 숨을 쉬었다

봄이 오면 너는 다시 영광을 누리려니와

나는 잊어도 좋다. 어둠처럼 까맣게 잊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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