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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21, 33-46 그분의 마음과 그분의 눈으로 본문

마태오의 우물/마태오 21장

마태 21, 33-46 그분의 마음과 그분의 눈으로

하나 뿐인 마음 2018. 10. 1. 17:27


밭 주인은 포도밭을 아주 정성껏 가꾸었다.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이사야 예언서 5장 2절을 읽어보면 이 말에 담긴 하느님의 심정이 어땠는지, 지금 이 비유를 시작하면서 굳이 예언서의 이 부분을 인용하는 예수님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다). 손수 이 모든 일들을 할 정도로 공을 들인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소작은 농토를 갖지 못한 농민이 일정한 소작료를 지급하며 다른 사람의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짓는 일이다. 본디 소작 관계는 주인도 소작인들도 함께 얻을 것이 있는, 즉 함께 잘 살게 되는 관계이다. 물론 현실이 늘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사회에서는 소작인들이 불공정을 겪거나 피해를 입는다. 비단 농사에서 뿐만이 아니다. 기업이 가진 기계와 부품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소작인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을 보면 주인이(회사의 오너) 손해를 입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복음에 나오는 주인은 좀 이상하다. 소작인들을 관리할 사람도 두지 않고 떠났고, 소작인들은 자신의 몫을 가지러 온 주인의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고, 심지어 돌을 던져 죽였다. 처음부터 과감하고 잔인하며 이해불가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데도 주인은 이들을 응징하지 않는다. 믿음을 거두지 않고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낸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더 많은 종들 역시 죽임을 당한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단순 소출 이익이었다면 이 일들을 처리하고 소작인들을 바꾸면 될 일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꾸만 믿고 종들을 보내면서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주인의 믿음은 소작인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믿음이었다. 미련할 정도로 믿고 또 다시 믿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아들까지 밖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한다. 포도밭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아무에게도 심지어 주인에게도 소출을 주지 않기 위해, 내 것이 아닌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들은 한치의 뉘우침도 없이 이 일들을 저질렀다. 나는 이 주인의 선택(믿음)을 실패라고 생각하는가.

비유 이야기는 아들의 죽음으로 서둘러 끝이 나고 예수는 결과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포도밭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으로 비유를 현실화 한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자신들의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소작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하시며 주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완성한 비유 이야기는 소작인들의 응징으로 마무리 되지만, 예수가 완성한 비유 이야기는 ‘주님이 이루신 놀라운 일’로 마무리 된다. 집 짓는 이들에 의해 내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는 이야기로 말이다. 그 돌이 주인이든 예수님이든(여기에서 당신 자신을 비유의 주인공으로 삼으셨다는 설명을 굳이 할 필요는 없겠다.) 버림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주인이 되어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나간다. 이 이해불가한 끝없는 믿음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겐 가장 놀라운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 내 생각만큼 하느님을 본다. 바오로 사도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본다’는 말처럼 나를 통해 하느님을 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의중을 알아차리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한 것도 그것들을 주님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지 않고서는 주님의 마음을, 주님의 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소작인들과 영원히 관계 맺길 원하는 주인은 비유의 결말도 그리 마무리를 짓고, 가혹하고 냉정하게 자신만을 챙기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결말도 가혹하고 냉정하게, 받는대로 되갚아주는 방식으로 마무리 짓는다. 실제로 그들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비유를 알아차린 후 그분을 붙잡으려고 했다(46절).

하지만 그들이 결론낸 이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포도밭을 차지하고 있다. 세상의 수많은 범죄자들이 여전히 뉘우치지도 않고 살아간다. 세상의 결론이 그들의 원의대로 가혹하고 잔인하게 되지 않는 건, 그들의 원의 보다 하느님의 원의가 더 크기 때문이겠지.

나는 누구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대하는지, 감실 앞에 머물며 되돌아 봤다. 내게 주신 것들을 주님께 다시 돌려드릴 때 나는 비로소 그분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음을, 그 힘이 그분으로 나옴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오랜만에 오랜 시간 감실 앞에 머물며 ‘봉헌의 삶’을 묵상했다. 내 마음과 눈이 그분의 빛을 잃지 않도록, 내가 살아갈 모든 힘을 그분 안에서 길어올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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